[한양도성] 보구여관과 흥인지문의 뒷얘기

한양도성 해설기 ⑧ / 혜화문에서 광희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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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우리나라 최초 부인진료소의 역사는 1886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이화학당을 설립했던 스크랜턴 여사와 그의 아들 스크랜턴이 미국 북 감리교 선교부 여자 외국선교회에 여성전용병원을 세워줄 것을 건의했다. 조선사회의 남녀유별 풍습에 따른 것이다.

1887년 정동 이화학당 구내에 세웠던 이 진료소의 설립자는 하워드(Miss Meta Howard)라는 여의사였고 고종은 그 진료소에 ‘보구여관’(保救女館)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유교의 영향 탓에 여성이 신체를 남의사에게 보일 수 없었기 때문에 부인진료소에서는 여의사가 진료를 맡았다.

이와 함께 1892년 미국 북 감리교 선교부 총무였던 볼드윈(L.B. Baldwin)부인의 기부금으로 세워진 동대문부인진료소는 그 이름을 ‘볼드윈진료소’라고 지었다. 이 진료소는 설립시기에 논란이 있는데 전후사정을 감안하면 1890년 상반기 이전에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910년 그곳에서 의료봉사를 한 의사 해리스(Dr. Lillian Harris)의 이름을 따 ‘해리스 기념병원’으로 개칭했고 같은 해 정동에 있는 여성전문병원 보구여관과 합병했다. 보구여관을 본원이라 하고 동대문부인진료소를 분원이라 한다면 분원이 본원을 합병한 셈이다.

개신교 개척기에 왜 교회보다 병원이나 학교가 먼저 설립됐을까. 첫번째 이유는 조선정부의 강력한 금교정책(禁敎政策) 때문이었다. 이에 초기 선교사들은 우회적인 방법으로 병원과 학교를 먼저 세웠고 꽤 효과적이었다.

동서양의 종교문화가 확연히 다른데 갑자기 전도하려면 애로가 많았을 것이다. 그러나 병을 치료해주면 장황한 설교를 듣는 것보다 효과적이었다. 의사이기도 했던 초기 선교사들은 환자와 오랫동안 친숙하게 지내면서 선교의 기회를 가졌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사람이 친지에게 의료선교사의 업적을 알리며 스스로 전도의 문을 열도록 한 것. 학교도 마찬가지다. 문맹을 줄여 장기적인 포교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정동교회보다 배재학당이 먼저 설립되고 동대문교회보다 동대문부인진료소가 먼저 설립된 것도 같은 이치다.


동대문(흥인지문). /사진=박찬규 기자

이 자리에는 동구여자상업고등학교도 있었다. 1892년 교회, 진료소와 학교를 함께 지었다. 당시 이름은 기부자인 볼드윈 이름을 딴 ‘볼드윈 여학교’였다. 교명은 일제강점기인 1941년 12월 ‘동구가정실수학교’로 개명했다가 광복 후 현재 이름이 됐고 1961년 3월 성북동으로 옮겼다.

◆보물 1호 흥인지문

왕산로 건너 흥인지문에 도착했다. 이른바 ‘동대문’이라는 별칭은 태조 때(태조 5년 9월24일의 기사)부터 불렀다. 조선왕조실록에도 동대문은 174건이나 기록돼 흥인문 또는 흥인지문이라고 기록된 195건과 빈도수가 비슷하다.

흥인지문은 청계천 변에 있다. 인왕산과 백악산(북악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도심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청계천을 이룬다. 동대문 일대는 도성에서 가장 낮은 습지라 성을 쌓을 때 많은 애를 먹었다. 하천 양쪽에 홍수로 인한 퇴적층이 쌓여 범람원(氾濫原, flood plain)이 됐는데 그 토양은 배수가 잘 되지 않는 점토질이다. 흥인문은 이 무른 점토질 토지 안에 돌과 나무를 채워넣어 세웠고 지반이 몹시 취약해 1398년 완공 후에도 여러번 보수했다.

건국 초기 세종, 문종, 단종 연간에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있었고 조선시대의 마지막 대대적인 보수는 고종 때(고종 5년 1868~고종 6년 1869)였다. 이때는 성문 대부분을 해체하고 새로 짓다시피 했기에 흥인지문을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목조건물이라 칭한다. 숭례문이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건축물이어서 국보 1호로 지정됐다면 흥인지문은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목조건축물로 인정받아 1963년 보물 1호로 지정됐다. 보수공사는 2005년부터 2007년 사이에도 계속됐고 2013년부터 시작된 옹성의 보수공사는 2015년 초에야 끝났다. 오늘날도 조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게 된다.

동대문은 태조 5년부터 7년까지 흥인문(興仁門)이라고 불렸다. 고종 때 만든 현판은 정사각형에 2줄의 세로글씨로 쓰여 지금까지 전한다. 흥인문의 이름에 ‘갈지’(之)를 넣어 흥인지문이 된 이유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흥인지문 부근의 취약한 지반을 보강하기 위해 용을 닮은 글자인 ‘之’를 넣었다는 속설이 이어질 뿐이다.


동대문 성곽공원과 서울 디자인 지원센터. /사진=박찬규 기자

흥인지문의 문루는 숭례문과 같이 2층으로 구성된다. 4대문과 4소문 중에서 남대문과 동대문만 문루를 2층으로 지은 건 그만큼 두 대문이 중요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문루는 숭례문과 같이 정면 5칸, 측면 2칸이고 우진각 지붕에 다포식 공포를 조성한 건물이다. 두 문의 유사점은 또 있다. 흥인지문 홍예 천장에는 쌍용이 그려져 있다. 왕을 상징하는 것은 황룡이고 왕세자를 상징하는 것은 청룡이다. 숭례문 홍예의 천장화도 쌍룡이다.

흥인지문에는 다른 대문이나 소문에는 없는 ‘옹성’(甕城)이 있다. 이는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로 성 밖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게 항아리 모양으로 에워싼 작은 성이다. 이곳의 지대가 낮아 적의 공격을 막기가 쉽지 않아 옹성을 쌓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문은 2중으로 쌓은 견고한 성문인데도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를테면 임진왜란 때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이 문으로 입성할 때 성문은 활짝 열려있었고 방어하는 군사가 없었다고 한다. 왜군은 매복 작전으로 의심해 여러번 정찰병을 보낸 다음에야 입성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선조가 도대체 무엇이 무서워 이렇게 튼튼한 성곽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갔을까”라며 비웃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초기에 한양을 떠나지 않겠다던 선조가 1592년 4월30일 새벽, 한양에서 몸을 피했다. 백성들은 적군이 오기도 전에 달아나는 임금을 두고 “저런 것도 임금이냐”고 성토했다. 뒤이어 경복궁과 창덕궁 등 도성의 궁궐은 성난 백성들에 의해 불탄 것으로 전해진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7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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