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여러 이름을 가진 광희문

한양도성 해설기 ⑫ / 혜화문에서 광희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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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옛 서산부인과 건물 자리에서 왕복 6차선 퇴계로(옛 왕십리길)를 건너면 광희문이다.

광희문은 혜화문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인 1928년에 헐렸다. 간신히 남겨진 홍예는 1975년 도로를 확장하며 15m 남쪽으로 옮겨 다시 쌓았다. 이때 문루도 복원했다. 일제가 흔적을 지운 혜화문과 달리 광희문은 우리가 철거한 것이다.

일제는 왜 광희문을 허물지 않았을까. 조선시대 일본 사신은 두모포 나루(豆毛浦·지금의 옥수동)를 거쳐 한천(漢川·지금의 중랑천)을 건너 광희문으로 들어와 동평관(東平館)에 머물렀다. 전차 궤도를 개설하면서도 흔적을 남겨둔 건 그들의 사신이 출입했던 성문을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광희문의 여러 이름

남대문과 동대문 사이의 광희문은 속칭 ‘남소문’으로 알려졌지만 현재 장충단길 언덕에 별개의 남소문이 있었다. 원래의 남소문은 도둑의 출입이 빈번하고 도둑과 수비대의 싸움으로 인명피해가 많아 예종 1년(1469)에 폐쇄됐고 이후 자연스럽게 광희문을 남소문이라 지칭했을 것이다.


광희문. /사진=뉴시스 고승민 기자

태조 5년(1396)부터 광희문은 이른바 수구문(水口門)으로 불렸다. 남산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줄기가 이곳 부근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에 그 이름이 붙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듯 조선왕조실록에 5대 왕인 문종 때부터 19대 왕인 현종 때까지 광희문이라는 기록은 단 한건도 없고 20대 숙종 때에서야 이름이 나온다. 실제로 광희문으로 연결되는 성벽의 축성양식도 숙종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만큼 광희문 문루의 중건공사 역시 그 당시에 이뤄졌을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광희문은 소의문처럼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불렸다. 실제로 도성 안의 시신을 이 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내보냈다. 임진왜란 때는 왜군에게 살해된 백성의 시체를, 조선 후기에는 천주교의 순교자를, 1882년에는 임오군란으로 죽은 군인을 내보냈다. 1886년 무렵에는 콜레라로 죽은 사람을, 1907년 군대가 해산될 때는 일제 군대와 싸우다가 죽은 조선 군인을 이 문밖으로 옮겼다. 광희문 밖 신당동 일대가 주거단지로 개발되기 전까지 공동묘지와 화장터가 자리한 배경이다.

조선시대 지방 사람들은 누군가 한양으로 올라간다고 하면 “시구문 돌가루를 긁어오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지독한 병에 걸리거나 고난을 겪다 시구문에서 죽은 사람들 때문에 성돌이 면역돼 그 돌가루가 만병통치약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콜레라와 이화학당

또 하나의 일화를 소개한다. 19세기 후반 한양도성 안에 콜레라가 창궐해 콜레라 환자가 하루에도 수백명씩 죽어 광희문과 소의문으로 나갈 때였다.

이화학당을 설립한 메어리 스크랜턴이 어느 날 광희문 밖으로 나갔다. 수많은 아이가 문밖에 버려진 참혹한 광경을 본 뒤 조선인 안내원에게 물었다. “아이들이 왜 성문 밖에 버려졌습니까.” 안내원은 “콜레라에 감염된 아이들입니다. 거의 죽기 직전이어서 성 밖으로 옮겨놓은 것입니다.” 스크랜턴은 “죽어가는 아이들을 집에서 치료해야지 왜 성 밖으로 버립니까”라며 망연자실했다.

그는 현장에서 한 아이를 데려와 치료했다. 병이 나은 그 아이는 이화학당에 다녔다. 이곳의 초기 학생은 주로 그런 아이들이었다.


1900년 전후 광희문. /사진제공=서울시립대학교 박물관

이렇듯 광희문은 그 이름처럼 영광스럽고 기쁜 일이 있었던 문이 아니라 망자를 뒤따르는 곡소리와 상여꾼의 장송곡이 끊이지 않았던 음침하고 우중충한 문이었다.

병자호란 때 인조는 이 문을 통해 남한산성으로 피난했다. 원래 계획은 숭례문으로 나가 강화도로 가는 것이었지만 숭례문에 도착했을 때 청나라 군대가 이미 양철평(良鐵坪·지금의 녹번동)까지 진격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남한산성으로 행선지를 바꿨다. 청군에게 붙잡힐 것을 우려한 인조는 임금의 품위나 체면도 버린 채 시체가 나가는 시구문으로 달아났다.

인조 14년(1636) 12월14일의 기사를 보면 이때의 사정을 알 수 있다.

“임금이 탄 수레인 대가(大駕)가 숭례문에 도착했을 때 적이 이미 양철평까지 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임금은 남대문 문루에 올라 문밖에 진을 치도록 병조판서 신경진에게 명했다. 그때 이조판서 최명길이 적진으로 들어가 오랑캐의 상황을 살펴보겠다고 청하니 임금은 그를 보내 오랑캐에게 강화를 청하면서 그들의 진격을 늦추도록 명했다. 그런 다음 임금은 수구문을 통해 소현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향했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8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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