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칼럼] <경세유표> 200년, 정약용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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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의 정치·경제학자로 다산 정약용이 꼽힌다. 그는 나라 정치를 바로잡고 백성생활을 향상시킬 방법을 학문적으로 연구해 무려 500권 넘는 저서를 남겼다.

올해는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경세유표>(經世遺表)가 탄생한지 200년이 되는 해다. 전남 강진에서 유배생활 중 현실에 맞도록 정치·사회·경제제도를 개혁하고 부국강병을 이뤄야한다는 생각으로 정약용이 1817년 저술했다.

서문에는 “이 나라는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게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말 것이다”고 쓰여 있다. 죄인으로 몰린 상황인 만큼 자신이 죽은 후 임금에게 바쳐질 글이란 뜻에서 ‘유표’라고 명명했다.

정약용 사후 2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는데 녹두장군 전봉준이 <경세유표>를 읽고 크게 감동받았다고 전해진다. 평등사상을 바탕으로 한 동학농민혁명의 주장은 정약용의 사유와 맥을 같이 한다. 그러나 지도층은 60여년간 패거리 세도정치를 펼쳤고 서양세력이 동방에 진출하던 시대의 흐름을 외면한 국가가 되고 말았다.

지난 17일 <경세유표> 저술 200주년을 기념하는 국회세미나가 ‘다산초당에서 정약용이 꿈꾼 나라’를 주제로 열렸다. 국가 개조방안을 담은 <경세유표>는 <목민심서>, <흠흠심서>와 함께 3대 저서로 꼽히는데 국가가 혼란한 시기면 거론되는 고전이다.

<목민심서>에는 수령의 부정부패를 막을 방법이 서술돼 현대에도 공직자 정신을 일깨우는 소중한 유산이다. <흠흠신서>는 형사사건을 다루는 관리를 계몽하기 위한 책으로 재판 시 필요한 소양을 서술했다. 서문에는 “법집행은 사람 목숨이 걸린 일이고 하늘의 권리를 대신해 사람(목민관)이 집행하는 것이니 조심스럽게 고민하면서 법집행을 해야 하는데 죽여야 할 자를 살리고 살려야 할 자를 죽이고도 부끄러움이 없다”는 말로 법집행관(목민관)의 방만한 의식을 질책했다. 현대의 법집행에서도 경찰·검찰이 깊이 새겨야 할 철학이 담겨있다.

◆28세 문과 합격… 실학의 완성자

정약용은 요즘으로 치면 금수저 집안의 자손이다. 8대에 걸쳐 잇달아 옥당을 배출한 학식 깊은 명문가였다. 옥당은 학문을 연구하고 왕에게 자문해주는 기관인 홍문관을 일컫는다. 어머니는 고산 윤선도의 5대손녀다. 정약용은 친가가 8대 옥당집안 학자 가문, 외가가 예술가 가문이라는 데 자부심이 있었다. 10세 이전에 지은 시를 모아 <삼미자집>이라는 책을 낼 정도로 어릴 때부터 글쓰기에 재주를 보였다. 22세에 소과시험인 생원시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중용에 관한 문답’으로 정조대왕 눈에 들었다.

정조가 <중용> 가운데 의문 나는 내용 70조목을 태학생들에게 대답하게 했을 때 정약용이 올린 답변을 보고 “다른 성균관 유생의 답은 대개 거친데 정약용의 대답은 독특하다. 그는 분명 학식이 있는 선비다”라고 칭찬했다.

대과인 문과에는 28세에 합격했다. 당시 소과에 이어 대과까지 20대에 통과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1000원짜리 지폐에 얼굴이 실린 이황(이퇴계)은 34세에 대과에 합격했고 시험의 천재인 이이(이율곡)가 29세에 장원급제했다. 권율은 46세에 합격했고 정약용의 제자 이학래는 40년간 시험에 매달리다 70세에도 낙방해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조선시대 500년을 통틀어 소과 합격자가 4800명이었고 그중 문과 대과를 통과한 사람은 고작 6%에 불과했다. 대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오르기 시작한 정약용은 예문관,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등 핵심부서의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했다.

정조는 정약용을 신임하고 총애해 그의 큰 꿈이 현실에서 실천되도록 지원했다. 그 결과 조선 후기 실학(實學)사상을 집대성한 실학의 완성자로 꼽히고 저술가·시인·철학자인 동시에 과학자·공학자로도 뛰어난 업적을 남겼다. 정조가 화성으로 행차할 때 한강을 건널 수 있는 배다리를 만들었고 수원 화성을 설계하는 임무를 맡기도 했다.

복합 도르래 ‘거중기’를 직접 고안해 10년이 소요될 화성의 건축기간을 2년9개월로 줄였다. 무거운 것을 들기 위한 과학적 발명품으로 손잡이가 달린 굴림대인 ‘녹로’도 화성 건축에 사용됐다. 건축기술 공법상 최초로 벽돌을 건축자재로 도입했는데 곡선 부분을 아름답고도 견고하게 만든 벽돌의 역할에 대해 현대 건축학자들도 놀란다.


/사진=이미지투데이


◆정치적 유배기간 명저 남겨

정약용의 인생이 꼬이기 시작한 것은 그의 매형인 이승훈이 조선 최초로 천주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정약용도 천주교에 관심을 기울이면서다. 정조는 천주교를 일시적인 현상으로 바라보고 온건한 정책을 폈지만 정조가 갑작스레 죽고 순조가 등극한 후 대왕대비 정순왕후는 천주교를 탄압해 신유박해가 일어났다.

이승훈과 셋째 형 정약종은 참수형을 당했는데 둘째 형 정약전과 정약용은 이미 천주교를 멀리해 사형은 면하고 유배를 갔다. 남인을 적극 등용했던 정조가 죽은 후 노론에서는 남인의 명문가인 이들을 제거하고 싶어했고 천주교 탄압을 명분 삼아 정치적 유배를 단행했다.

정약용은 고난의 시간 동안 지성을 키우며 명저를 남기는 데 주력했다. 저술한 책 대부분이 유배생활 18년간 쓰여졌다.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내 책이 후세에 전해지지 않으면 후세 사람들은 사헌부(검찰청)의 보고서나 재판 서류를 근거로 나를 (죄인으로) 평가할 것이다.”

당대에는 법적으로 죄인이라도 후세에 역사의 재평가를 받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정약용은 살아있을 땐 적에게 졌지만 죽은 후에는 그들을 능가했다.

자녀들이 가문의 몰락으로 출셋길이 막혔다며 학문을 포기하자 자주 편지를 보내 공부하기를 독려했다. <여유당전서>에 실린 ‘두 아들에게’란 서신에서 “이제야말로 공부할 때가 됐다. 가문이 망했으니 오히려 더 좋은 처지가 된 것이 아니냐? 가난이 축복이다. 마음에 성의만 있으면, 난리 속에서도 반드시 진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요즘 흙수저론으로 대변되는 패배의식에 젖은 젊은이라면 음미해볼 말이다.

유배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18년간 자유로운 몸으로 살았다. 그러다 우연처럼 혼인 60주년 되는 날 아침 자택에서 별세했다. 아내는 2년 뒤에 세상을 떠났다. 정약용이 회혼일을 3일 앞두고 쓴 ‘회혼시’(回婚詩)는 그의 마지막 시가 됐다.

조선시대에는 평균 수명이 길지 않아 부부가 60년이나 함께 산 경우가 드물었지만 지금은 장수시대여서 부부의 연을 이어가는 세월도 길어지고 있다. 그가 남긴 마지막 시 회혼시는 요즘 사람들에게도 가슴 깊은 울림을 가져온다.

회혼시
六十風輪轉眼翩(육십풍륜전안편) - 육십년 세월, 눈 깜빡할 사이 날아갔는데도
?桃春色似新婚(농도춘색사신혼) - 짙은 복사꽃, 봄 정취는 신혼 때 같구려.
生離死別催人老(생리사별최인로) - 살아 이별하고 죽어 헤어짐이 사람을 늙게 재촉하지만
戚短歡長感主恩(척단환장감주은) - 슬픔은 짧았고 기쁨은 길었으니 성은에 감사하오.
此夜蘭詞聲更好(차야란사성갱호) - 이 밤 목란사(木蘭辭) 소리 더욱 좋고
舊時霞?墨猶痕(구시하피묵유흔) - 그 옛날 치마에 먹 자국은 아직도 남아 있소.
剖而復合眞吾象(부이복합진오상) - 나뉘었다 다시 합하는 것이 참으로 우리의 모습이니
留取雙瓢付子孫(류취쌍표부자손) - 한쌍의 표주박을 자손에게 남겨 줍시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15호(2017년 11월22~28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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