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 '이해' 가로막는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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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학교에서 가장 큰 학생의 키가 185㎝라고 하자. 같은 학교에서 흰 양말을 신고 온 학생 중 가장 큰 키가 얼마인지 알아보니 190㎝란다. 말이 되는가. 이럴 수는 절대 없다. 두번째 답은 185㎝보다 클 수 없다. ‘오늘 흰 양말을 신고 온’과 같은 것을 구속조건(constraint)이라고 한다. 조건을 하나 더해 ‘흰 양말을 신고 안경을 쓴’으로 하면 가장 큰 키는 더 작아진다. 구속조건은 대상 학생 수를 줄여 최적값을 바꾼다.

‘변화를 꿈꾸는 과학기술인 네트워크’(Engineers and Scientists for Change)라는 과학기술인 단체가 있다. 필자도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ESC의 ‘열린 정책 위원회’를 중심으로 헌법의 과학기술 관련 조항을 개정하려는 노력이 진행되고 있다. 현 헌법의 ‘제9장 경제’에 들어있는 제127조 1항은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과 정보 및 인력의 개발을 통하여 국민경제의 발전에 노력하여야 한다’이다. 이 조항을 바꾸자는 노력이다.

과학기술의 발전을 위해 국가가 노력해야 한다는 점에 과학자들이 딱히 반대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헌법 조항에는 국가가 ‘왜’ 과학기술을 개발해야 하는지가 명확히 적혀 있다. 바로 ‘국민경제의 발전’을 위해서라는 것이다. 현 헌법의 조항은 과학기술을 경제발전에 구속시키고 있다.

지난번 소개한 핀치 연구를 기억하시는 지. 이 연구를 진행한 연구자에게 “당신들의 연구가 어떻게 경제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나요”라고 물어보면 이들은 황당한 표정을 지을 것이다. 여기서 독자가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게 있다. 이들의 잡종 핀치 연구가 앞으로 영원히 경제발전에 도움이 안된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다. (사실은 그 반대로 도움이 될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이들이 경제발전에 도움을 주기 위해 수십년간 핀치를 관찰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이런 예는 수없이 많다. 뉴턴이 중력법칙을 연구한 것은 300년 후 인공위성을 발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고 100년 전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론 연구도 우리가 매일 쓰는 자동차 내비게이터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당시의 경제발전이라는 시각으로 연구를 할지 말지를 뉴턴과 아인슈타인이 결정했다면 우린 지금 훨씬 불편한 세상에 살고 있을 게 분명하다. 미래의 경제에 도움이 될 과학을 원한다면 경제발전이라는 구속조건을 없애는 편이 오히려 더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과학자가 고를 수 있는 연구주제의 전체 집합을 생각하면 그중 ‘경제발전을 위한’이라는 구속조건이 붙은 주제의 집합은 전체의 부분집합일 뿐이다. 경제발전이라는 구속조건을 없애면 주제의 탐색공간은 더 커진다. 사실 과학자가 연구를 하는 이유는 자연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이해’가 아닌 다른 ‘~을 위해’서가 아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25호(2018년 1월31일~2월6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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