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조선초 역사를 간직한 인왕산 성곽

한양도성 해설기 ㉛ / 숭례문에서 창의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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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인왕산 기슭 성곽길. /사진=허창무 한양도성해설가 제공

행촌동과 사직동을 구분하는 소방도로 사거리에서 인왕산 방향으로 걷는다. 성곽은 이곳부터 인왕산을 넘어 숙정문까지 완전하게 복원됐고 성곽탐방로도 잘 정비됐다. 탐방로는 축성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볼 수 있는 만큼 바깥쪽을 추천한다.

성곽을 따라가다가 주택지 옆으로 난 좁은 성곽길로 진입하면 교남체육공원이 나온다. 이 구간의 성곽에서도 태조·세종·숙종 때의 축성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서쪽으로 무악동현대아파트가 내려다보이고 북쪽으로는 인왕산이 지척에서 손에 잡힐 듯 보인다.

성곽 산책로를 200m쯤 더 올라가면 무악동에서 인왕산 스카이웨이로 연결되는 찻길과 마주친다. 도성 성곽을 허물고 만든 도로인데 성곽이 끊긴 자리에 초병이 상주하는 초소가 있다. 인왕산 남쪽 등산로의 시작지점이다.
국사당. /사진=허창무 한양도성해설가 제공

◆인왕산의 사적과 유적

성안으로 능선을 따라가는 인왕산 등산로는 바로 성곽길로 이어진다. 인왕산등산로를 오르기 전 성 밖 인왕산의 명물을 살펴봐야 한다. 산록 아래 국사당(國師堂)이 있고 그 위에 선바위가 있다. 소설가 박완서가 소설에서 전자는 굿당이라고 하고 후자는 형제바위라고 말한 바위다.

일제는 1925년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을 때 목멱산 정상에 있던 국사당을 철거해 이 자리로 옮겼다. 국사당이 일제의 신사보다 높은 곳에 있는 것을 용인할 수 없어 이전을 강요했다고 한다.

남산에 있을 때는 목멱대왕을 모셨기 때문에 목멱신사(木覓神祠)라고도 불렀다. 지금은 국가가 운영하지 않고 당주(堂主)가 소유하며 무당의 요청에 따라 유료로 운영한다. 정식 명칭은 ‘인왕산 국사당’이다. 굿을 하면 시끄러우므로 민가와 좀 떨어진 산중턱에 지은 굿당 중 하나다. 중요민속문화재 제28호(1973년 7월16일)로 지정됐다.

건물양식은 앞면 3칸, 옆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한 건물인데 이전 당시 원래 사용했던 자재들을 그대로 가져다가 지었다. 내부에는 단군, 조선 태조 이성계, 칠성신(七星神: 사랑, 재물, 성공, 행운, 무병장수, 소원성취, 복을 관장하는 신), 최영장군의 신인 신장(神將), 천연두와 관련 있는 별상신과 호구아씨, 점술과 관련된 곽곽선생, 예능의 신인 창부, 민중전(閔中殿), 산신령(山神靈)등의 무신도(巫神圖)가 있고 무신도 옆에는 각종 무구(巫具)가 놓여있다.
선바위. /사진=허창무 한양도성해설가 제공

◆승려의 모습 닮은 선바위

국사당 위로 시커먼 바위 둘이 나란히 서있다. 높이가 7~8m, 가로 11m, 폭이 3m쯤 되는 우람한 바위다. 얼른 보면 괴물 같기도 한데 자세히 보면 민머리를 하고 장삼을 걸친 탁발승의 모습과 흡사하다. 두 손 모아 기원하는 승려의 모습을 닮아 ‘선(禪)바위’(서울시 주요민속자료 제 4호)라고 하는데 장삼바위라고도 부른다.

바위는 풍화작용으로 길고 둥근 구멍이 잔뜩 뚫려 분위기가 독특하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은 이 바위를 찾아와서 소원을 빈다. 특히 아들 낳기를 바라는 여인들이 끊임없이 찾아와 기도하는 곳이어서 기자암(祈子巖)이라고 부른다. 엇비슷하게 생긴 두개의 바위가 하나의 쌍을 이뤄 예전에는 ‘이성계 부부 바위’라고 하기도 하고 이성계와 그의 왕사였던 무학대사가 사이좋게 서있다고도 했다.

조선 초 도성 성곽을 쌓을 때 선바위와 얽힌 일화가 있다. 선바위를 도성 안으로 넣을 것인가 도성 밖으로 할 것인가를 두고 무학대사와 정도전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무학대사는 불교를 상징하는 선바위가 마땅히 도성 안에 있어야 불교가 융성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유학자인 정도전은 도성 밖에 있어야 불교가 쇠미해지고 유교가 흥왕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성계는 그들의 주장에 고심했다. 한 사람은 왕사였고 또 한 사람은 첫손가락에 꼽히는 개국공신이어서다. 그러던 중 눈이 내렸다. 이성계는 눈 내린 인왕산을 보러가자는 정도전의 제언을 듣고 그와 함께 현장답사에 나섰다. 그때 오늘날의 도성 성곽 안쪽에만 눈이 녹은 모습을 보게 됐다. 태조는 이 현상을 하늘이 내린 계시라고 생각했고 눈이 녹은 곳과 녹지 않은 곳의 경계선을 따라 성곽을 쌓게 했다. 결국 선바위는 성 밖에 남게 됐다.

눈 때문에 한양도성의 경계가 정해졌다고 해서 눈 설(雪)자가 들어가는 눈 울타리 ‘설울’이라고 부르다가 후에 ‘ㄹ 받침’이 묵음화돼 서울이 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그것은 서울 성곽을 ‘설성’(雪城)이라 부르는 이유와도 같다.

◆불교와 인연이 깊은 산

본격적으로 성 안쪽 등산로를 따라 등산을 시작한다. 선바위 위로 특이한 바위들이 잇따라 보인다. 계곡 건너 성곽 가까이에 어미가 아이를 업고 있는 모양의 ‘모자바위’가 있는데 두꺼비를 닮았다고 해서 ‘두꺼비바위’라고도 한다. 성곽탐방로는 머지않아 곡장(曲墻)에 이른다. 곡장 바로 아래 곡장을 등지고 ‘부처님바위’가 있다. 부처님이 가부좌로 앉아 좌선하는 모습과 닮았다. 그 바위는 얼굴바위라고도 한다.

이래저래 인왕산은 불교와 관계가 깊은 산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연산군 때까지 인왕사(仁王寺)라는 절이 있어 산 이름도 인왕산이라고 했다. 지금도 여러채의 절이 산자락과 중턱에 모여 있다. 조선 초기 한때는 서산(西山) 또는 서봉(西峰)으로 부르다가 기록상으로는 세종 때부터 인왕산으로 표기했다.

인왕(仁王)은 불법을 수호하는 인왕신(仁王神)을 말한다. 금강역사(金剛力士)라고 해서 손에 금강저(金剛杵)를 들고 있거나 나형(裸形)으로 주먹으로 치려는 분노의 상도 있다.

일제는 이 산 이름을 인왕산(仁旺山)으로 가운데 한자를 바꿨다. 旺은 日(일)자와 王(왕)자가 합해진 것으로 자신들의 왕을 의미하려고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서울시에서는 광복 50주년인 1995년 원래 이름으로 바꿨다.

☞ 본 기사는 <머니S> 설합본호(제526호·제52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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