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서울의 ‘우백호’ 인왕산

한양도성 해설기 ㉜ / 숭례문에서 창의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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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인왕산의 모습. /사진=머니투데이 이명근 기자

인왕산 정상 ‘낙월봉’(落月峰)에 오른다. 높이는 338m로 내사산 중 백악산 다음이지만 서울을 시원하게 내려다볼 때는 인왕산의 전망이 으뜸이다. 무엇보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이 바로 아래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보인다.

조선은 한양 천도를 결정하며 ‘주산’을 정하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산으로 삼고 백악산과 남산을 각각 좌청룡 우백호로 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려면 법궁인 경복궁의 정문을 동향으로 내야 한다. 하지만 정도전은 법궁의 정문을 동향으로 낸 적이 없다면서 백악산을 주산으로 삼았다. 당시 무학대사는 그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200년 후 도성이 큰 화를 당할 것이라고 예언했고 개국 후 정확히 200년 만에 임진왜란으로 경복궁과 창덕궁 등 궁궐이 모두 불탔다.

◆인왕산은 ‘우백호’

조선 초 유신들의 주장에 따라 인왕산은 내사산 중 우백호(右白虎)가 됐다. 실제로도 인왕산에는 호랑이가 자주 출몰했다고 한다. 인왕산과 안산 사이 무악재는 원래 ‘모아재’라고 불렀다. 인왕산 호랑이가 행인을 해치므로 여러 사람이 모아서 재를 넘으면 호환(虎患)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고 이후 발음이 변하며 현재의 무악재가 됐다.

조선왕조실록에도 인왕산 호랑이와 관련된 기사가 여러 곳에 나온다. 고려 때 한성판관 강감찬이 노승으로 둔갑한 호랑이를 꾸짖어 그 호랑이가 무리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갔다는 이야기며 인왕산 호랑이가 무악재에서 고양시 효자리 선친의 묘소에 참배하러 다니는 효자 박태성을 매번 등에 태우고 다녔다는 이야기 등 수없이 많다. 나아가 곡장에서 정상으로 넘어가는 제3봉인 주홀봉 능선에 웅크린 ‘범바위’는 인왕산의 고사를 뒷받침한다.

인왕산은 온통 바위산이다. 군더더기 없는 정수만을 고스란히 남긴 정결한 모습이다. 산기슭에만 흙이 쌓여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아카시아와 참나무 종류가 숲을 이뤘고 산중턱부터는 대표적인 양수(陽樹)인 소나무가 정상을 향해 포복하듯 엎드려있다. 한국적 진경산수가 진면목을 보인다. 백호를 닮은 산이기 때문일까.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바위가 허옇게 맨살을 드러낸다.

인왕산은 이름난 바위가 많다. 선바위, 모자바위(두꺼비바위), 범바위, 달팽이바위, 매부리바위, 기차바위, 해골바위, 치마바위, 장승바위, 부처님바위 등이 유명하다. 그중에서도 부처님바위는 나다니엘 호손의 ‘큰바위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궁극적으로 자신을 구제하는 것은 황금도 권세도 아닌 각성과 성찰이라는 교훈을 주기 때문일 것이다.

인왕산은 정상에 다가갈수록 가팔라지고 암반이어서 오르기에 숨이 차다. 성곽을 따라가다가 경사가 급한 곳은 깎아지른 암벽이어서 적군의 접근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곳은 바위 자체가 성곽과 같은 역할을 한다. 천연의 요새다.

부처님바위 뒤 봉우리에 설치한 곡장은 여러 방향에서 공격하는 적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만든 시설이다. 평지의 치성과 같은 기능을 한다. 예나 지금이나 전략적 중요성은 동일한지 지금도 군부대가 자리 잡고 있다.
한양도성길 인왕산구간 /사진=뉴스1 신웅수 기자

◆출입통제로 감춰진 절경

인왕산은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을 내려다본다는 이유로 연산군 9년(1503년)에 이 산에 있던 복세암, 금강암, 천향암 등의 사찰과 그 부근의 민가까지 모두 철거했다. 그해 11월에는 인왕산 입구에 경수소(警守所)를 설치해 입산을 금지했다. 조선시대 내내 인왕산은 도성안의 내사산 중 하나이면서도 일반 백성들이 오를 수 없는 가깝고도 먼 산이었다.

이런 사정은 군사정권 아래서도 마찬가지였다. 안보상의 이유로 군사정부 내내 출입이 통제됐다가 1993년 문민정부가 출범하며 시민들에게 개방됐다. 지금은 동서남북 할 것 없이 하루에도 수백명의 시민들이 등산을 하며 망중한을 즐기는, 옛 도성의 자취를 내려다보며 영고성쇠 하는 역사의 무상함을 되새기는 시민공원이다.

인왕산 정상에서 성벽을 따라 백악산을 향해 내려오면 산기슭 길까지 얼마 남지 않은 지점에서 군부대에 막혀 더 이상 갈 수 없다. 오른쪽 길을 따라 내려오면 포장도로에 닿는다. 이 도로가 북악스카이웨이로 이어지는 인왕산스카이웨이다. 1968년 무장간첩 김신조 일당이 침투한 이후 전략상 인왕산과 백악산에 낸 군사도로인데 후에 그 길을 스카이웨이라고 이름지었다.

그러나 이 길은 인왕산과 백악산을 가로지르며 많은 자연파괴로 경관을 해친 도로가 됐다. 겸재 정선이 1750년경 필운대, 대은암, 청풍계, 청송당, 자하동, 독락당, 취미대, 수성동을 그린 ‘장동팔경첩’의 배경은 이 스카이웨이와 군인아파트 때문에 자취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예부터 인왕산은 도성 안에서 경치 좋기로 소문난 곳이었다. 조선후기의 정선은 비온 뒤의 산뜻한 풍경을 효자동쪽에서 그린 '인왕제색도'를 남겼고 강희언은 자하문 근처 도화동에서 '인왕산도'를 그렸다. 전자는 갓 삶은 창포물에 머리감은 새아씨 같이 말끔한 인상을 주고 후자는 호랑이가 웅크렸는데 금방이라도 포효하며 일어날 것 같다.

이 작품들은 조선의 아름다운 자연을 실감나게 그려 실경산수(實景山水)라고 한다. 영‧정조대 중흥기를 맞으면서 정체성을 찾으려는 우리네 자긍심이 회화에까지 그 영향을 미친 셈이다.

인왕의 저 높은 산정에서 석양의 광휘와 곧 그 뒤따라 어둑한 핏빛으로 물드는 서울의 서부, 그리고 성저십리 너머 옛 개풍군까지 이어지는 김포평야의 아득한 지평선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저물어오는 황혼에 온몸이 묻힐 때까지 통일의 염원과 서울의 번영을 되새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29호(2018년 2월28일~3월6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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