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 집행유예로 집에 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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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 기업 부회장이 집행유예로 석방됐다.

이 사건을 보면서 많은 사람이 ‘유전무죄’를 떠올렸다. 하지만 형사소송법에 ‘피고인의 재산이 1000억원 이상인 경우는 형을 감한다’는 조항이 있다면 모를까, 법치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국가에서 피고의 재산이 판결에 영향을 미칠 리가 있겠는가.

사실이 아닌데도 사람들이 자꾸 ‘무전유죄, 유전무죄’를 얘기하니 우리나라 법원은 얼마나 억울할까. 개가 사람을 물면 신문에 안 나도, 사람이 개를 물면 신문에 난다. 유전무죄도 비슷한 선택 치우침 효과 때문에 생기는 일종의 착시가 아닐까.

어쨌든 재밌는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이럴 때 먼저 데이터를 모아 피고의 재산과 형량 사이의 상관관계를 살펴보는 식으로 연구를 시작한다. 혹시나 하고 찾아보니 역시나 이미 비슷한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왜 법원은 재벌(범죄)에 관대한가?’(최한수 저), 그리고 ‘횡령·배임범죄에 관한 양형기준의 적용 현황 및 개선방안 연구-고위지배주주를 중심으로-’(영남대학교 산학협력단) 바로 두 문서다. 두 보고서의 결론은 명확했다. 재벌은 집행유예로 석방되는 경우가 많았다.

두 보고서에서 찾은 집행유예의 비결을 소개한다. 일단 다른 범죄보다는 횡령, 배임 등 경제 관련 범죄가 유리하다. 또 쩨쩨하게 몇십억이 아니라 피해액을 통 크게 300억원 이상으로 하는 것이 중요하다. 범죄 피해액이 300억원 이상인 경우 100% 집행유예였다.

300억원을 채우지 못했어도 아직 실망하지 마시라. 재벌회사의 최고위직이 되면 300억원을 못 채웠어도 상당히 높은 확률로 집에 갈 수 있다. 재벌이라고 다 같은 재벌이 아니다. 10대 재벌의 최고위직이면 더 도움이 된다. 10대 재벌 최고위직이고 동시에 300억원 이상을 횡령할 수 있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을 데이터가 말해준다.

재벌의 집행유예와 관련된 두 보고서의 결론에 대해 조심할 것이 있다. 상관관계가 곧 인과관계는 아니라는 점이다. 초콜릿 소비량과 노벨 수상자 수 사이에는 아주 명확한 상관관계가 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초콜릿을 좋아하는 나는 아주 잘 알고 있다. 초콜릿을 많이 먹는다고 훌륭한 과학자가 되는 건 아니다. 명확한 상관관계는 둘 사이의 숨겨진 인과관계의 존재를 의미할 때가 많다.

법원이 유전무죄가 근거 없는 오해라고 국민을 설득하는 것은 아주 쉽다. 재벌과 집행유예 사이에 상관관계가 전혀 없다는 데이터를 보여주면 된다. 그전까지 우리사회에서 유전무죄는 잠정적 진실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30호(2018년 3월7~13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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