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혈흔처럼 남은 ‘인조반정’ 역사

한양도성 해설기 ㉟ / 숭례문에서 창의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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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한양도성 창의문 /사진=문화재청 제공

최규식 경무관 동상에서 창의문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있다. 창의문은 북소문에 해당하는 문으로 자하문(紫霞門)이라고 부른다.

속설에는 이 부근 골짜기에 자욱한 안개가 자주 끼어 이 일대를 자하동이라고 불렀고 자하문도 동네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자하문은 인왕산과 백악산 능선의 가장 낮은 곳에 있다. 여기서 보면 세검정 골짜기에 노을이 질 때 북한산 봉우리들이 뿌연 안개 위에 솟아오른 것과 같아 자하골이라 불렀다는 설도 있다.

◆신영동과 평창동의 지명유례

자하골에는 세검정 골짜기의 물을 이용해 한지를 만드는 ‘조지서’가 있었다. 태종 15년(1415) ‘조지소’라는 이름으로 설치했다가 세조 11년(1465)에 조지서로 이름을 바꿨다. 실록편찬이 끝나면 글쓴이의 비밀을 보장하고 그 기록을 없애기 위해 사초나 초고를 세검정에서 흐르는 물에 씻는 세초(洗草)작업을 했다.

세초 후 먹으로 쓴 글씨를 없애고 재생된 종이는 세검정 근처에 있는 조지서로 보냈다. 세검정의 차일암(遮日巖)에서 세초가 끝난 다음에는 ‘세초연’을 베풀었다. 지금도 이곳 큰 바위에 뚫린 구멍에서 차일암의 흔적을 볼 수 있다.

현재 세검정초등학교 터에는 신라 때 지은 ‘장의사’라는 사찰이 있다. 누각이 수십채나 되고 승려가 1100여명에 이른 장의사는 고려부터 조선 중기까지 영화를 누린 호화로운 절이었다. 하지만 불교 탄압이 시작된 연산군 때 절을 허물고 유흥과 사냥을 위한 장소로 사용했다.

그 후 숙종 38년(1712) 군사훈련소인 연융대(鍊戎臺)를 세웠다. 영조 23년(1747)에 한양 서북쪽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 이 자리에 총융청을 설치했는데 새로운 군영이 들어섰다는 뜻의 ‘신영동’이라는 마을이름이 생겼다.

또 이곳에는 국가의 비상사태를 대비해 평창(平倉)이라는 2개의 창고를 지었다. 이 중 상창은 총융청의 창고였고 하창은 대동미를 보관하는 선혜청의 창고로 쓰였다. 신영동의 옆 동네인 평창동은 선혜청의 창고인 평창이 있었기에 붙인 이름이다. 그러다 고종 때 총융청은 없어지고 1886년 이후 300여 칸에 이르는 건물과 넓은 터는 신식군대인 별기군의 훈련장이 됐다.

창의문이 있는 동네는 조선시대 장의동이었으므로 장의문(藏義門)이라고 불렀지만 조선후기부터는 쓰이지 않았다. 창의문은 '의'를 드러내는 문이라는 뜻으로 지은 이름이다. 1623년 3월13일 광해군을 왕위에서 축출하기 위해 인조반정을 일으킨 반정군들이 이 문을 통해 궁궐에 진입했기에 붙은 이름이다. ‘세검정’ 또한 이때 반정군이 칼을 갈고 씻었다는 사건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한양도성 인왕산 구간. /사진=뉴스1 신웅수 기자

◆문은 닫아도 멈추지 않은 발길

지금의 창의문은 영조 17년(1741) 보수한 문이다. 4소문 중 온전히 남은 유일한 문이다. 창의문 홍예 중앙엔 봉황 조각이 새겨져 있고 천장에는 봉황이 그려졌다. 전해오는 말에 따르면 창의문 밖 계곡에는 지네가 많았는데 천적인 닭을 부려야 했다. 하지만 도성의 성문에 닭을 그릴 수 없어서 봉황을 그렸다. 봉황은 ‘수컷 봉’(鳳)과 ‘암컷 황’(凰)의 합성어여서 천장의 그림 또한 수컷인 봉은 부리를 붉은 색으로, 암컷인 황의 부리는 푸른색으로 그렸다.

숙정문과 마찬가지로 창의문도 조선시대 내내 출입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태종 13년(1413) 6월19일 실록에는 풍수지리가인 최양선의 건의에 따라 태종이 장의동 일대에 소나무를 심도록 명령했고 이후 창의문은 통행할 수 없었다.

하지만 6년 뒤인 세종 4년에는 도성수축을 위해 문을 일시 개방한 적이 있다. 또 세종 28년(1446) 4월15일의 기록에도 “성문 통행이 자유로우니 명령을 받고 출입하는 사람 이외에는 창의문을 항상 닫아두라”고 명령했던 것으로 보아 그 후로도 성문의 개방과 폐쇄가 간헐적으로 이뤄졌던 것 같다. 문종 2년 3월3일 풍수지리가 문맹검이 문을 닫도록 건의했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탓인지 예종 1년 다시 병조에 명해 강력한 폐문지시를 내렸다.

중종 1년에도 박원종 등 반정공신들이 똑같은 폐문 건의를 했다. 그러다가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조가 몽진길에 올랐다가 환궁한 후 북한산성 축성론이 나오면서 폐문을 해제한 것이나 다름없는 사정이 됐다. 북한산을 가려면 창의문이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광해군 9년(1617) 3월17일에는 선수도감(국가의 건축도감을 관장했던 영건도감의 옛 이름)이 궁궐의 담장공사에 필요한 돌을 운반하기 위해 창의문을 열도록 건의했다. 이런 일은 조선중기까지 계속 반복되다가 이후 창의문 출입금지는 해제된 것과 마찬가지였다.

창의문 문루는 언제 건립됐을까. 영조 17년(1741) 문루를 세웠다는 기록은 확실하지만 그 이전에는 문루가 없었을까. 조선왕조실록에 임진왜란 때 창의문의 문루가 불탔다는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임진왜란 때 불타버렸던 문루’라는 옛 안내판의 설명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인조반정을 기리는 의미에서 창의문의 문루를 설치했다는 설에 더 믿음이 간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35호(2018년 4월11~17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허창무 한양도성해설가 star@mt.co.kr

산업2팀 박찬규 기자입니다. 자동차와 항공, 해운, 조선, 물류, 철강 등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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