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트로가 뜬다] 1분당 33바퀴… 다시 도는 아날로그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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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첨단기술의 홍수를 거슬러 투박한 옛 모습 '레트로'가 떠오른다. 레트로 열풍은 패션과 가전제품의 디자인 영역을 넘어 생활 전반에 빠르게 파고든다. 레트로 상품은 겉만 복고풍이고 속은 최첨으로 채워 또 하나의 경제적 가치를 실어나른다. <머니S>가 최근 마케팅의 키워드로 떠오르는 레트로 열풍을 추적했다. 레트로 열풍의 원인을 분석하고 복고에 열광하는 이들의 일상을 살펴본다. (편집자)


'331/3'. 무슨 뜻일까. 1980년대 이런 숫자를 상호로 내건 음악카페가 있었다. 이 숫자는 LP의 분당 회전속도를 말한다. 1970~1980년대 음악 마니아들의 추억으로 남아있는 LP는 이제 아날로그 감성을 상징한다. 

직경 30㎝에 턴테이블과 톤암, 카트리지, 스피커, 앰프가 있어야 음악을 재생할 수 있는 LP는 이제 너무 크고 거추장스럽다. 1980년대부터 카세트테이프에 자리를 내주다 1990년대 CD, 2000년대 MP3, 이제는 스마트폰 스트리밍 서비스에 밀려나면서 구닥다리로 전락했다. 

작고 가벼운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음악을 척척 재생할 수 있는 지금, 1분에 30여바퀴씩 지직거리며 돌아가는 LP는 일찌감치 용도폐기됐어야 할 옛 시절의 유물이다. 최근 옛 유물이 보란듯 부활하고 있다. 세상 모든 정보를 손아귀에 쥘 수 있는 디지털 세상에 질린 이들이 아날로그에 열광하는 레트로 트렌드에 따라서다.   

레트로 마니아들은 1Bit와 2Bit의 무한 증식으로 만들어내는 디지털 세상에서 탈옥을 꿈꾼다. 눈에 보이는 궤적을 따라 바흐에서 브루흐까지, 패티 페이지에서 마돈나까지 수많은 음악을 쏟아내는 LP에 매료된다.

나이테처럼 촘촘한 LP의 나선 홈에 담긴 수백만곡의 음악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서울 회현동 지하상가 터줏대감 ‘리빙사’를 찾았다. 리빙사는 전국에서 손꼽히는 옛 레코드 가게다. 빽빽한 LP판으로 가득한 리빙사는 세월을 거슬러 과거와 현재를 잇는다.

◆날것으로 듣는 풍성한 질감의 소리

이석현 리빙사 사장. /사진=박효선 기자

‘지지직.’ LP판 위로 카트리지가 살포시 내려앉는 순간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음악이 흘러나온다. 카트리지는 구불구불한 LP판의 골을 지나며 섬세하게 소리를 뽑아낸다. 귀에 익숙한 모차르트의 바이올린 협주곡이 스마트폰으로 듣는 것과는 또 다른 질감으로 귓전을 때린다. 눈을 감자 바로 곁에서 연주하는 듯 소리가 공간을 가득 채운다.

“사람들이 LP에 대해 오해하는 부분이 있어요. LP판에서 잡음이 난다고들 하죠. 그런데 실제 LP판 자체는 소리가 깨끗해요. 오히려 LP가 내는 소리의 질감이 더욱 풍성하죠. 지글거리는 잡음은 소홀한 관리로 미세한 상처가 남은 LP나 오래 쓴 카트리지, 또는 턴테이블 불량에서 나오는 거예요.”

이석현 리빙사 사장은 사람들의 오해를 지적한다. 그는 “LP를 통해 듣는 음악 소리가 스마트폰에서 듣는 소리보다 깨끗하다”며 “스마트폰으로 듣는 음악은 지나친 고역대나 저역대 등 여러 음역대를 일정한 톤에 맞춰 어느 정도 잘라내다 보니 소리가 인위적이고 왜곡되는 부분이 있지만 LP는 모든 음역대를 그대로 담아낸다”고 설명했다. 

◆재조명되는 LP… 외국인도 ‘디깅’

/사진=박효선 기자

음악 마니아들은 아날로그의 풍성한 음역대를 찾아 LP판을 고른다. 리빙사 앞에는 종이박스를 하나씩 옆에 낀 사람들이 쪼그리고 앉아 LP를 고르고 있었다. LP에 향수를 느끼는 중장년층뿐 아니라 문화콘텐츠 주 소비층인 20~30대의 관심도 커졌다.

이 사장은 “예전엔 주로 중장년층이 LP를 찾곤 했는데 요즘에는 20~30대 젊은층이 부쩍 늘었다”며 “가수 중에 저희 가게 오랜 단골인 분이 있고 외국인관광객도 종종 일부러 찾아와 LP판을 구입하곤 한다”고 말했다.

“LP판은 직접 찾아보시는 걸 추천해요. LP판을 찾는 것을 디깅(digging)이라고 하는데 LP판을 하나하나 넘기며 ‘파다’ 보면 예상치 못한 귀한 LP를 구하게 될 겁니다.”

리빙사는 전국 각지의 LP소매상들이 찾을 정도로 다양한 양질의 LP를 갖추고 있다. 클래식부터 재즈, 팝, 록뮤직, 가요 등 거의 모든 장르가 총망라됐다. 옛날 음반만 취급하는 게 아니다. 최신 영화 OST나 요즘 뜨는 가수들의 신곡도 LP판으로 판매한다. 그저 추억으로 존재하지 않겠다는 작은 변화의 움직임으로 읽힌다. 다만 여전히 어려움은 있다. 

“언젠가부터 LP가 부활했다느니 하면서 복고바람이 불자 대기업이 LP시장에 뛰어들더군요. LP 수요가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대기업의 시장 침범으로 저희는 또 다른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을 지켜낼 겁니다. 여길 찾는 사람들은 다 사연이 있어요. 리빙사가 없어지면 그 추억들도 사라지지 않겠어요?”

◆레트로 갈증 달래는 오아시스 

리빙사는 1963년 이 사장의 장인 고 정호용씨가 문을 열었다. 그는 지난 50년간 음반시장의 몰락을 직접 지켜봤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카세트테이프와 CD가 나오면서 음반점은 대형화의 길을 걸었다. 이후 MP3가 CD를 대체하던 2003년부터 정씨의 사위 이 사장이 리빙사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스마트폰 스트리밍 서비스로 음악을 듣는다. 

“아버님(정호용씨) 아니었으면 리빙사는 오래전 없어졌을 거예요. LP판매는 수익 때문에 하는 게 아니거든요. 돈 벌 생각이었으면 여기서 옷 장사를 했겠죠.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신신당부했어요. 돈 못 벌어도 리빙사를 계속 운영했으면 좋겠다고.”

고 정호용씨가 그토록 지키고 싶던 리빙사. 이 사장이 장인의 약속을 2대에 걸쳐 지켜가고 있다. 이들의 약속은 레트로시대를 맞아 많은 사람이 복고의 갈증을 채우는 오아시스로 남게 됐다. 옛 음악적 감수성을 간직한 어른아이들은 이곳을 찾아 중고음반을 '디깅'한다. 이들 덕분에 음악은 여전히 귀하고 리빙사의 시간은 분당 33바퀴 더하기 1/3 속도로 흘러간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42호(2018년 5월30일~6월5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박효선 rahs1351@mt.co.kr

안녕하세요. 증권팀 박효선입니다. 많은 격려와 질책의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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