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북향’이라 닫아야 했던 문

창의문에서 숙정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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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숙정문. /사진=허창무씨 제공
청운대에서 성곽탐방을 계속하려면 ‘청운다리’라는 목조구름다리를 건너 도성 밖으로 나가야 한다. 백악산탐방로에서 성 밖을 걷는 유일한 구간이다. 군부대 주둔지에서 빗겨난 탐방로를 성 밖으로 낸 것이다. 이 덕분에 45년쯤 통행이 없었고 마치 DMZ처럼 생태계가 잘 보존됐다. 이 구간에서는 목멱산구간과 같이 시대별 성벽축조형태를 볼 수 있다.

짧은 탐방로가 끝나면 성안으로 들어가는 청풍암문이 나온다. 들어가기 전 암문 왼쪽에 시대별 축성 차이를 설명한 안내판이 있다. 이곳의 암문은 평상시 백성들의 출입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군사들이 순찰하기 편리하도록 만든 것으로 예상된다.

보도블록으로 정비된 도성 안 탐방로를 걷다보면 성곽이 밖으로 툭 튀어나온 곡장(曲墻)이 나온다. 곡장(또는 곡성)은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성벽의 일부를 둥글게 돌출시킨 것이다. 지금 보면 백악산의 이 곡성은 오히려 성 안팎의 수려한 경치를 조망하기 위해 설치한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곳에서 백악산 정상까지 마치 만리장성처럼 이어지는 성곽의 장관이며 산악과 도심이 대비되는 경관이 오묘하고 매혹적이어서다.

◆촛대바위전망대와 쇠말뚝

곡장을 뒤로 하고 숙정문 쪽으로 240m 내려가면 ‘촛대바위전망대’가 있다. 촛대를 닮아 촛대바위라고 부르는데 높이가 13m나 된다. 지금은 바위에 오르지 못하도록 난간을 쳐 접근할 수 없다.

바위 위에는 작은 표지석 하나가 있다. 일제강점기 한민족의 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박았던 쇠말뚝을 뽑아버리고 표지석을 세웠다.

이 전망대에서는 백악산자락 아래 폭넓게 자리 잡은 경복궁의 모습이 낱낱이 보인다. 경복궁의 중심이 되는 근정전과 그 아래 시원하게 뻗은 세종로를 본다. 또 그것의 남쪽 연장선상에서 멀리 가물가물 손짓하는 것 같은 관악산을 본다. 풍수지리에서는 관악산이 경복궁의 화인(火因)이 된다니 그런 역설을 어떻게 설명할 수가 있을까. 대한문 앞 해태 석상은 관악산 불길을 막기 위한 물상이었고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붙인 것도 그 때문이었다.

촛대바위전망대에서 숙정문으로 내려가는 길은 소나무가 우거진 오솔길이다. 백악산은 배수가 잘 되는 바위산인 데다 척박한 토질이어서 활엽수의 생장조건에는 맞지 않아 소나무가 이 산의 주인공이 됐다. 소나무나 전나무 같은 침엽수에서 많이 나온다는 피톤치드를 흡입하기 위해 어깨와 가슴을 쭉 펴고 심호흡한다. 기분이 한결 상쾌해지고 쌓였던 피로도 풀린다. 다음 여정을 위해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곳이다.

◆숙정문의 이름 바뀐 사연

소나무 숲을 내려오면 숙정문(肅靖門)에 이른다. 능선에 홀로 세워진 성문은 인가와 멀리 떨어져 좀 외로워 보인다고 할까.

숙정문은 다른 성문처럼 태조 5년(1396)에 세워졌다. 당시의 성문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었다. 그 이름이 언제 바뀌었는지 알 수 없으나 중종4년(1509) 6월3일 기사에 숙정문이라는 이름이 처음 등장했다.

속칭으로 정북문 또는 북대문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그렇게 불리기보다 실제로 북정문(北靖門) 또는 북청문(北靑文)으로 더 많이 불렸다.
경복궁. /사진=뉴시스 배훈식 기자

◆가뭄 닥쳐야 여는 북쪽 대문

숙정문은 도성 안 삼청동계곡에서 도성 밖 성북동으로 나가는 북쪽의 대문이다. 이 문을 나가면 한양에서 원산까지 가는 경원가도의 지름길에 이른다. 하지만 조선시대에 일반통로로는 사용되지 않았다.

숙정문 건립 후 18년째인 태종 13년 풍수지리가 최양선이 백악산의 양팔에 해당하는 창의문과 숙청문을 닫아서 지맥(地脈)을 보존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결국 숙정문은 폐쇄됐고 창의문과 숙정문 가는 길에 소나무를 심은 탓에 일반인의 통행이 어려워졌다.

이곳을 폐쇄한 또 다른 이유는 이 문이 북문으로서 ‘음’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 문을 열어두면 부녀자의 풍기를 문란하게 하는 상중하간지풍(桑中河間之風)이라는 바람이 불어온다는 속설 때문이었다. 이 얘기는 조선 현종 때 실학자인 오주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 나온다. 상중하간지풍은 “고대 중국 주나라 선혜왕 때 귀족들이 매우 음란해 뽕나무밭에서 남녀가 밀회했다”는 ‘시경’의 문구에서 유래한 것으로 부녀자의 풍기문란행위를 뜻한다.

실제로 숙정문 밖 성북동 일원에는 선잠단(先蠶壇·사적 제 83호)이 있었고 양잠을 위한 뽕나무밭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사대부집 부녀자들이 숙정문 밖에 있는 뽕나무밭에서 은밀한 애정을 즐겼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그리고 정월대보름 전에 부녀자가 숙정문을 세번 다녀오면 그 해에 일어날 재난의 운수가 사라진다고 해서 도성 안 많은 부녀자들이 숙정문을 찾았다는 얘기도 있다. 그와 함께 숙정문을 찾는 부녀자를 희롱하러 오는 남정네들이 몰려들어 풍기가 문란해지자 성문을 닫았다고도 한다.

숙정문을 열 때도 있었다. 여름철 한발이 닥치면 숙정문은 열고 숭례문을 닫고 기우제를 지냈다. 이런 행사는 북쪽은 ‘음’에 해당하며 남쪽은 ‘양’에 해당한다는 음양오행설에 근거한다. 가뭄에는 북쪽의 숙정문을 열어 음기를 도성 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남쪽의 숭례문을 닫아 양기가 도성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가뭄에 남문을 닫고 북문을 여는 이유는 남문은 목화토금수(木火土金水)에서 화(火)에 해당하고 북문은 수(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남문을 닫아 화기를 막고 북문으로 물 기운이 도성 안으로 들어와 가득 차게 해야 비가 온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기우제를 지낼 때는 시장을 옮기고 인정과 파루(罷漏)를 치지 않았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43호(2018년 6월6~12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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