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 별곡] 공시생 떠나는 '백로의 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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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진이 무너지고 있다. 서울 한복판 교통의 요지, 국내 최대 수산시장이 손짓하는 곳. 청년 수만명이 공무원시험 합격의 꿈을 안고 불을 밝히는 공시촌…. 1970년대 후반 전국에서 모여들기 시작한 ‘청춘의 꿈’은 노량진을 기회의 땅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40여년이 지난 최근 노량진은 모래성처럼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다. 평화롭던 ‘백로의 땅’ 노량진은 왜 서울의 골칫거리로 전락했을까. <머니S>가 최근 노량진 공시촌과 수산시장 일대에 닥친 위기의 원인을 찾아봤다. -편집자-


“지금 밖을 한번 봐. 한창 사람 많아야 하는 시간인데 사람은 커녕 강아지 한마리 없잖아요. 이러다가 가게 문 닫아야 할 판이에요. 맥도날드 뒤쪽, 그 쪽도 한번 가봐. 싹 다 죽었다니까.”

공시생(공무원 시험 준비생)의 성지, 공무원의 산실로 불리던 노량진이 말라가고 있다. 노량진의 지역 경제를 이끌던 공무원시험 수험생 감소, 수산시장 상인들을 포함한 주변 상권의 갈등과 재개발 이슈 등이 맞물리면서 2018년 여름, 노량진이 변화의 기로에 섰다.

서울과 경기 서부, 충청도를 잇던 ‘노들나루’ 노량진은 '백로가 노닐던 나루터'라는 뜻을 가졌다. 서해에서 한강 뱃길 따라 서울로 들어오는 지리적 특성으로 노량진은 옛부터 어물전에 해산물을 공급하는 경강시장의 하나로 발전했다.

‘백로의 땅’에 학원가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 말 정부의 인구밀집 해소정책이 시행되면서다. 종로에 있던 유명 입시학원은 1979년 노량진1동으로 대거 이전했고 수험생과 유동인구가 급증하면서 자연스럽게 상권이 형성됐다. 이후 약 40년간 노량진 학원가는 연간 5조원이 들고나는 큰 시장이었는데 최근 들어 그 기반을 지탱하던 공시생들이 노량진을 떠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사진=임한별 기자

◆‘인강’ 발달에 흔들리는 노량진

“예전에는 요 앞 골목에 사람이 진짜 많았어. 서로 빨리 가려다가 싸움도 나고 그랬다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냥 동네 골목이 됐지 뭐. 사람 없는 것 봤잖아.”

노량진1동에서 20년째 구멍가게를 운영 중인 김모씨(63)는 노량진의 과거를 회상하며 푸념을 늘어놨다.

그의 말대로 노량진의 인구는 꾸준히 감소했다. 특히 청년층의 감소가 두드러졌다. 통계청에 따르면 노량진1·2동의 20~30대 인구는 2012년 5만319명을 정점으로 ▲2013년 5만145명 ▲2014년 4만8976명 ▲2015년 4만8021명 ▲2016년 4만6900명 ▲2017년 4만5997명 ▲2018년 4월기준 4만5881명으로 매년 줄었다. 6년이 채 지나기 전에 약 10%에 가까운 청년층이 노량진을 빠져나간 셈이다.

인구 감소는 인근 상권의 위축을 불러왔다. 지난달 대형 고시식당 ‘고구려’와 ‘토마토’ 두곳의 폐업은 노량진의 현실을 여과없이 보여준다. 식당 관계자는 온라인커뮤니티와 식당 앞 대자보 등을 통해 “수험생의 감소, 임대 계약 만료 등의 이유로 부득이 운영을 중단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폐업 이유를 설명했다.

올해 국가·지방직 공무원 지원자는 21만명에 달한다. 지난 4월7일 실시된 국가공무원 9급 필기시험에 응시한 이들만 15만5388명이다. 조사 결과 우리나라 13~24세 인구 가운데 10명 중 4명은 미래 직업으로 공무원을 가장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정작 40년 공무원의 산실 노량진은 쇠퇴하고 있다.

입시학원 한 관계자는 “인터넷강의(인강)의 발달이 노량진을 찾는 수험생이 급감한 첫번째 원인”이라고 지목했다. 그는 “인강은 새벽같이 일어나서 ‘노트줄’을 서는 수고로움을 덜 수 있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에서도 자유로워 인기를 끌고 있다”며 “여러 사람이 돈을 모아 돌아가며 수업 동영상을 시청할 수 있어 비용이 절약되는 점도 한몫한다”고 말했다.

지난해까지 3년간 노량진에서 경찰공무원을 준비하다 올해 인강으로 전환한 박모씨(31·남)는 “실강(학원에서 직접 수업을 듣는 것)을 듣다가 인강을 들으니 수강비용만 3분의1 이하로 줄었다”며 “월세, 식대 등 기타 비용을 포함하면 가격차이는 더 벌어진다. 지금 노량진에 남아있는 친구는 거의 없다”고 말했다.


/사진=임한별 기자

◆컵밥마저 외면한 공시생

일각에서는 노량진에 닥친 위기는 공시생의 주머니 사정을 외면한 상인들이 초래했다는 의견도 나온다. 4~5년 전 ‘노량진의 명물’로 떠오른 컵밥이 대표적이다. 컵밥이 인기를 끌던 당시 수험생들의 주머니 사정에 맞게 3000원을 넘어서는 메뉴를 찾기 어려웠으나 최근에는 평균 4500~5000원으로 값이 뛰었다.

서울 다른 지역의 물가와 비교했을 때 확연히 저렴하지만 인상률을 보면 납득하기 어렵다는 원성이 자자하다, 특히 지방에서 올라온 공시생이 많은 노량진의 특성상 두배 가까이 뛴 가격에 돌아선 고객이 대부분이다.

7년째 노량진에서 공무원시험을 준비 중인 이모(35)씨는 “컵밥만큼은 가격이 오르지 않을 줄 알았는데 컵밥 거리가 조성되고 외부인들이 노량진 컵밥을 찾기 시작할 때쯤 가격이 올랐다”며 “한두차례 노량진을 찾는 이들을 보고 상인들이 가격을 올린다면 노량진 공시생의 이탈은 더 가속화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대형프랜차이즈의 난립도 ‘공시생의 메카’라는 노량진의 정체성을 해체하며 공시생 이탈을 부추긴다. 저렴하고 간편하게 끼니를 해결할 수 있는 식당이 주를 이루던 과거와 달리 최근 노량진 거리에서는 햄버거 세트 하나가 1만원에 육박하는 유명 패스트푸드점과 아메리카노 한잔에 4000원이 넘는 카페 프랜차이즈를 더 쉽게 찾을 수 있다.

노량진에서 30년을 살았다는 주차장 관리인 임모씨(60)는 “돈 없는 공시생들이 먹기엔 비싼 음식을 파는 곳이 더 많아졌다”며 “싼 음식점이 없어지고 물가가 오르니 돈 없는 공시생이 떠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학생들 돈 뜯어먹으려고 하다가 동네가 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44호(2018년 6월13~19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박흥순 soonn@mt.co.kr

<머니S> 산업1팀 IT담당 박흥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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