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칼럼] 웰빙, 그 이상의 가치 ‘에코다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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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처음으로 조성된 국유수목장림. /사진제공=산림청
‘꽃을 사랑하는 분들께 드립니다’라고 적혀 있는 화분을 고르던 국문과 대학원생 정인은 기차시간에 서두르다 한 남자(환유)와 부딪혀 지갑을 떨어뜨린다. 환유는 택시를 타고 기차를 쫓아가 지갑을 돌려준다. 그렇게 시작된 둘의 만남은 사랑을 꽃피우고 행복한 결혼생활로 이어진다.

하지만 너무 완벽한 사랑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인지 수목원에서 일하는 환유는 뇌종양에 걸려 투병을 하게 되고 정인에게 “나중에 화장해서 제 잣나무 옆에 뿌려주세요. 우리 정인이 공부하는 거 빼놓고는 철부지 애하고 다를 거 없어요. 제 무덤 있으면 아마 평생 혼자서 쩔쩔매면서 살 거예요”라고 한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 남편으로부터 편지가 오기 시작한다.

박신양과 최진실이 출연한 영화 <편지>는 외환위기로 힘들었던 1997년 많은 관객을 울리면서 한국영화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웠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남편 사후에 임신 사실을 알고 아이를 낳은 정인이 아들을 아버지가 묻힌 나무에 인사시킨다. 정인은 나뭇가지를 붙잡고 속삭이고 아이는 나무 앞에서 뛰어 논다.

SBS TV 드라마 <흐르는 강물처럼>(2002년 11월 방영 시작)의 최종회에서는 묘목 밭에 앉은 아버지가 “여보, 나는 세상에 어떤 흔적도 남기고 싶지 않아. 나 죽거든 화장해서 뼛가루, 이 묘목 밑에 묻어 주라. 그러면 여기 봄 되면 새순이 나와 꽃도 필 거고 가을이면 고운 단풍으로 살 수 있잖아”라고 말하자 엄마는 “알았어. 나도 당신 컴컴한 땅속 깊이 묻어버리고 싶지 않아”라며 자연으로 돌아가겠다는 남편의 자연회귀관을 받아들인다. 수목장(수목형 자연장) 개념이 국내에 별로 알려져 있지 않던 시절, 영화와 드라마에 수목장이 이미 나온 것이다.

◆확산되는 수목장 선호도

수목장이 사회적으로 사람들의 관심을 받게 된 시점은 2004년에 임학자 고 김장수 고려대 명예교수의 화장한 유골이 그가 아끼던 50년생 굴참나무 아래 묻힌 때였다. 평생을 사랑한 숲과 나무 곁에 묻히길 원했던 그의 소망이 이뤄지면서 나무에는 ‘김장수 할아버지 나무’라는 표찰이 붙었다. 독일의 프리드발트사 사장은 ‘한국의 첫번째 수목장’이라고 적힌 표찰을 선물했다.

이어 2005년에 한국 대안교육의 선구자로 간디학교를 세운 양영모 이사장의 유골이 경남 산청 간디학교 교정 느티나무 아래 묻혔다. ‘수목장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라는 모임도 생겼다. ‘목포의 눈물’로 잘 알려진 가수 고 이난영씨 묘소는 경기도 파주의 공원묘지에 있었지만 2006년 3월에 목포 삼학도로 이장하면서 백일홍 나무 아래에 수목장으로 옮겨졌다. 유명인들의 수목장이 알려지면서 화장한 유골의 골분을 나무 아래 묻는 자연장이 한국에서도 늘어나기 시작했다.

재벌 총수 중 수목장을 치른 첫번째 사례는 지난 5월20일 뇌종양 수술 후유증으로 별세한 고 구본무 LG그룹 회장이다. 장례는 고인의 생전 뜻에 따라 화장 후 경기도 광주 곤지암 화담숲 인근에서 수목장으로 진행됐다. 화담숲은 고인이 2006년부터 직접 조성한 생태공원으로 식물 4300종, 조류 25종이 어울려 사는 곳이다. 과도한 의전을 싫어했던 그의 성품에 따라 회사에서 추모행사도 하지 않았으며 비공개 가족장으로 단출하게 치렀다. 외부의 조문과 조화도 받지 않으려 한 것은 평소 “나 때문에 번거로운 사람은 없어야 한다”는 고인의 뜻이었다.

그룹 매출을 30조원에서 160조원으로 5배 이상 늘리고 해외매출은 10조원에서 110조원으로 10배 이상 끌어올려 글로벌기업으로 성장시킨 뛰어난 기업가적 역량 대비 개인 성품은 소탈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이 사석에서 “상대적으로 LG가 재벌 가운데 윤리경영과 지배구조 측면에서 가장 모범적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한 적도 있다. 대기업 회장의 장례가 소박하게 수목장으로 진행된 것은 수목장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이 높아지는 계기가 됐다. 수목장을 하고 싶은 생각이 있지만 전통적 관습과 가족의 분위기 때문에 망설이던 사람들도 기꺼이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경기도 파주 용미리 추모의 숲 수목장. /사진=뉴시스 장세영 기자
◆친환경적이고 저렴한 비용


수목장의 개념은 스위스의 전기기술자 윌리 자우터가 처음으로 만들었다. 영국인 친구가 1992년에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이 죽은 후에도 그와 함께할 수 있도록 스위스에 묻어달라고 부탁해 친구의 분골을 마을 뒷산 나무 아래에 묻는 방법을 창안했다. 나무가 친구의 분골을 흡수해 친구 보듯이 그 나무를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자우터는 수목장 탄생지인 뒷산을 ‘프리트 발트’(평화의 숲)로 이름 짓고 특허까지 받았다. 장목(葬木)에는 고인의 이름, 생년월일, 사망일, 장목번호가 새겨진 명패만 걸고 다른 치장은 금지했다. 한국처럼 국토가 좁아서 묘지 난을 겪고 있던 스위스에서는 1999년부터 자연산림을 그대로 활용하는 수목장림이 빠르게 보급돼 현재 약 70개의 수목장림이 조성됐다.

독일에서는 2001년에 라인하르츠발트 수목장림이 처음 등장해 퍼져나갔으며 현재 100여개의 수목장림이 운영되고 있다. 공·사유림을 활용해 토지소유주와 전문기업이 공동으로 운영한다. 그외 영국을 비롯한 유럽 여러 나라에서 수목장이 보편화됐으며 일본에서는 1990년대 후반부터 새로운 장례문화로 활성화됐다.

한국에서는 2005년만 해도 수목장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적었다. 당시 수목장에 대한 시민의식 조사결과 58% 이상이 수목장을 모른다고 응답했고 23%는 조금 안다고 응답했다. 하지만 일단 수목장에 대해 아는 경우에는 절반 이상이 긍정적 태도를 보였다. 2007년에 관련법이 개정돼 첫 국립수목장림인 하늘숲추모원이 2009년 5월에 경기도 양평 국유림에 개원했다.

48ha 면적의 하늘숲추모원에는 소나무, 잣나무, 참나무류 등 6315본의 추모목이 있다. 안치유골 5인으로 제한하는 공동목은 1년 사용료가 4만9000원이다. 가족목은 최대 10인의 유골까지 안치 가능하며 A등급 가족목의 경우 1년 사용료가 15만5000원, 기본 안치인(3인) 초과 시 4만5000원이 추가된다. 추모목 최초 사용기간은 15년이며 한번에 15년씩 3회까지 연장해 최장 60년을 사용할 수 있다. 지금은 하늘숲추모원 외에도 공립 수목장인 파주 서울시립수목장을 비롯해 다수의 수목장이 전국에 있다.

◆웰빙만큼 중요한 웰다잉

수목장에서 골분을 묻는 방법은 흙에 직접 뿌리는 방법(스위스식)과 생분해성 유골함에 담아 묻는 방법(독일식)이 있다. 전자는 간편하고 분해가 빠른 특성이 있는 반면 뼛가루(유골)를 직접 만져야 한다. 후자는 정갈하지만 분해가 늦다. 한국의 수목장에서는 주로 후자를 사용하지만 전자를 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김장수 교수의 수목장은 전자로 행해졌다. 나무 둘레에 30~40㎝ 흙을 파내고 고분을 고인의 부인이 뿌린 후 다시 그 위에 흙을 덮었다. 영화 <편지>에는 수목장이란 말이 안 나왔지만 전자로 묘사됐다.

수목장은 묘지를 만들면서 산림이 훼손되는 자연파괴를 막고 무덤을 관리하는 부담을 덜어 준다. 공원묘지나 납골당을 이용하다 계약기간이 끝나면 생겨나는 2차 작업 부담도 없다. 젊은 세대일수록 사후 유골에 관한 유지관리를 힘들게 여기기 때문에 수목장은 좋은 선택이다. 각종 설문조사에는 ‘화장 후 수목장을 원한다’는 응답 비율이 절반을 훨씬 상회한다. 자연친화적인 장례와 비용부담이 적은 수목장을 선호하는 경향이 확산됨에 따라 한국에서도 수목장이 지속적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어떻게 잘 먹고 잘 살까를 생각하는 웰빙 못지않게 어떻게 삶을 의미 있게 잘 마무리할까를 생각하는 웰다잉도 중요하다. 나무 옆에 묻은 생분해 항아리는 뼛가루와 함께 몇달에서 몇년 사이 흙으로 분해돼 자연의 일부가 되고 다른 생명을 위한 거름으로 바뀐다. 죽은 후 나무의 거름이 돼 나무로 동화(同化)하는 방식의 ‘에코­다잉’은 ‘사람은 자연에서 태어나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존재’라는 말처럼 온전한 자연으로의 회귀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46호(2018년 6월27일~7월3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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