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일본도 훔치지 못한 ‘보물’

한양도성 해설기 ㊶ / 숙정문에서 혜화문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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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성북동 전경 /사진=성북구청 제공

성북동을 지칭하는 이름은 참 다양하다. 조선시대에는 성북동을 북저동(北渚洞)이라 불렀다. 서민들이 성북동 언덕에 복숭아나무를 심었기 때문인데 복사꽃이 필 때면 꽃놀이를 하려는 사람들과 거마(車馬)가 몰려들었다고 한다.

민간인들은 도성 북쪽을 ‘도화동’(桃花洞)이라고 불렀다. 어영청 부대가 그곳에 주둔해 ‘성북둔’(城北屯)이라고 불렀고 옛날에는 ‘묵사’(墨寺)라는 절이 있어 ‘묵사동’(墨寺洞)이라고도 불렀다. 일제강점기에는 ‘성북정’(城北町)이라는 일본식 이름만 남았다. 성북정은 광복 후 성북동이 됐다.

성북동은 사연만큼이나 기념물이 많은 곳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이라고 할 수 있는 간송미술관, 조선 철종 때 이조판서를 지낸 심상응이 별장으로 지었다가 후에 의친왕(1877~1955)의 별궁으로 사용된 성락원(城樂園), 만해 한용운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기 싫다고 북향집을 지어 말년을 지냈던 심우장(尋牛莊) 등이다.

또 조선 말기 젓갈상인 이종상의 별장을 대림산업 이재준 회장이 매입해 이름이 바뀐 이재준가, 수연산방(壽硯山房)이라는 전통찻집이 된 소설가 이태준의 옛집, 한국내셔널트러스트가 시민문화유산으로 지정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의 저자인 전 국립중앙박물관장 혜곡 최순우(1916~1984)의 옛집 등도 이름난 곳이다.

이 중 좀 더 살펴볼 기념물과 문화재가 있다. 먼저 서울시 민속문화재 제 11호로 지정된 상허 이태준의 가옥이다. 그는 1933년 이곳에 이사 온 후 1946년 월북할 때까지 이 집에 살면서 ‘황진이’, ‘왕자호동’ 등을 집필했다. 지금 전통찻집의 이름이 된 수연산방은 이태준이 지은 이 집의 당호다. 문인들이 모이는 산속의 집이란 뜻이다.

이 고택은 사랑채를 따로 두지 않고 사랑채와 안채를 합쳐 누마루를 붙인 게 특징이다. 안채에서 맞은편 언덕의 성곽을 바라볼 수 있게 설계한 것이다. 도시화가 진행되며 변해간 한옥의 한 면이다. 지금은 높은 집들이 많이 들어서서 그가 탐닉했던 성곽을 볼 수 없다.
간송 전형필 선생 흉상 /사진=허창무씨 제공

◆간송 전형필과 간송미술관


휘문고보와 일본 와세다대 법학과를 졸업한 간송 전형필은 일제강점기에 우리나라 문화재가 일본으로 반출되는 것을 막기 위해 고서화와 골동품을 수집했다. 1934년 성북동에 북단장(北壇莊)을 개설해 본격적으로 문화재를 모았고 1938년 한국 최초의 사립박물관인 보화각(葆華閣)을 북단장 안에 개설, 서화뿐만 아니라 석탑과 불상 등도 수집했다. 그의 소장품은 대부분 국보 및 보물급의 문화재로 김정희, 신윤복, 김홍도, 장승업 등 회화작품부터 서예, 자기류, 석불, 서적에 까지 이르며 한국미술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1940년에는 보성고등학교를 인수해 육영사업에 힘썼고 광복 후에는 문화재보존위원으로 고적 보존에 주력했다. 1962년 그에게 대한민국문화훈장이 추서됐다.

보화각이라는 이름은 오세창이 지은 것으로 ‘조선의 보배를 두는 집’이라는 뜻이다. 1966년 보화각은 간송미술관으로 개칭됐다. 리움미술관, 호림박물관과 더불어 대한민국 3대 사립박물관 중의 하나인 간송미술관에는 국보가 12점, 보물이 10점, 서울시 지정문화재가 4점이나 보존돼있다. 1971년부터 봄, 가을로 1년에 두번씩만 일반에 무료공개한 점에서 볼 수 있듯 전시보다는 연구 및 보존에 역점을 둔 미술관이었다. 하지만 2014년 3월 동대문디자인플라자 개관전을 계기로 간송소장품 상설전을 열면서 지금까지의 운영방침을 바꾸려 노력 중이다.

간송미술관에는 몇번의 위기가 있었다. 한국전쟁 때 미술관이 송두리째 사라질 뻔했고 서울이 함락됐을 때는 북한군이 간송미술관의 유물들을 평양으로 이송하려 했다. 이때 짐을 싸는 척 늑장부리며 시일을 끌었던 최순우 등의 지혜로 그 위기를 간신히 모면했다.

간송미술관의 가치는 돈으로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경매에 붙인다면 전시물을 파는 데만 1년이 넘게 걸린다고 한다.
수연산방(이태준 가옥)의 안뜰(왼쪽 아래 이태준문학의 산실이란 표지석이 보인다) /사진=허창무씨 제공

◆혜곡 최순우의 가옥

성북2동에는 고고미술학자이며 미술평론가였던 혜곡 최순우가 살았던 집이 있다. 2006년 9월19일 등록문화재 제268호로 지정돼 재단법인 내셔널트러스트 문화유산기금에서 소유·관리 중이다. 이 집은 1930년대의 전형적인 경기지방 한옥양식이다. ‘ㄱ자형’ 본채와 ‘ㄴ자형’ 사랑채, 행랑채가 마주보고 있어 전체적으로 ‘ㅁ자형’ 구조를 이룬다. 가운데에 중정이 있고 그 옆에는 작은 우물이 남아있다.

국립중앙박물관장으로 한국미의 발견에 심혈을 기울인 최순우는 1976년부터 1984년 사망하기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이곳에서 유명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서서’ 등을 집필했다. 그는 저서에서 ‘아는 만큼 느낀다’는 명언을 남겼다. 그의 천부적인 심미안은 조상들의 조형예술품을 자연미가 꿈틀거리는 생명체로 부활시킨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47호(2018년 7월4~10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허창무 한양도성해설가 star@mt.co.kr

산업2팀 박찬규 기자입니다. 자동차와 항공, 해운, 조선, 물류, 철강 등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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