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 ⑩ 조선을 망친 '성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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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미지투데이
한국은 어떻게 식민지배와 6·25전쟁으로 인한 자산파괴를 단기간에 극복하고 세계 10대 경제대국과 민주화를 달성했을까. 삼성전자는 어떻게 반도체와 휴대폰에서 세계 1위가 됐고 방탄소년단은 어떻게 빌보드차트 1위에 올라 K-Pop 열풍을 전 세계로 확산시켰을까.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한 것으로 당연시됐던 일이 기적처럼 현실이 되는 배경엔 무엇이 있을까. ‘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에선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우리의 인문학적 바탕을 찾아본다. -편집자-

“마굿간에 불이 났다. 공자가 퇴청해서 사람이 다쳤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말에 대해선 묻지 않았다”

주희는 <논어> ‘향당’편에 나오는 ‘廏焚退朝曰傷人乎不問馬’(구분퇴조왈상인호불문마)라는 문장을 “말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사람이 상했는지 두려워하는 마음이 커 말에 대해 물을 여유가 없던 것이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짐승을 천하게 여긴 이치가 이와 같다”고 해석했다. 

주희를 주자로 부르며 공자보다 더 높이 떠받든 우암 송시열 등 조선 성리학자들은 이 해석을 금과옥조로 여겼다. 주자의 글 중 한글자라도 다르게 쓰면 ‘사문난적’이라고 몰아붙이고 목숨까지 빼앗았다.

◆‘사문난적’으로 몰려 죽은 백호 윤휴

명대 양명학자들은 주희의 논어 해석에 이의를 제기했다. 공자 같은 성인이 사람만 챙기고 말은 못 본 체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주장. 그들은 “마구간에 불이 났다. 공자가 퇴청해서 사람이 다쳤는지 아닌지를 물었다. 그리고 말에 대해서도 물었다”로 달리 해석했다. 조선 중기의 백호 윤휴도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 “더 높은 이해의 경지를 개척해야 한다”면서 새로운 해석을 시도했다.

윤휴의 이런 열린 자세는 공자의 가르침과 통한다. 공자는 “이단을 공격하는 것은 해로울 뿐”이라고 가르쳤다. 스스로 덕을 밝히고 지극한 선에 머물도록 수신하는 게 중요하지 다른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가를 따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다. 남과 자꾸 비교하기 좋아하는 자공에게 “賜(사·자공의 이름)는 어진가? 나는 남과 비교할 여가가 없다”고 나무랐다.

나아가 “천하가 돌아가는 곳은 같아도 그곳에 이르는 길은 다르며 도달하는 곳은 하나지만 생각은 백가지”(天下 同歸而殊途 一致而百慮, <주역> 계사하전 5장)이듯 나만 옳다고 주장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주자 신봉론’에 빠진 조선 성리학자들은 윤휴를 규탄했고 당쟁 과정에서 사문난적으로 몰아 목숨을 빼앗았다.

오직 ‘주자의 눈’으로만 유학 경전을 읽었기 때문에 ‘知者樂水 仁者樂山’(지자요수 인자요산)을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뜻으로만 읽었을 뿐 이 말 바로 뒤에 나오는 ‘지혜로운 사람은 동적이며 즐겨하고 어진 사람은 정적이며 오래 한다’(知者動 仁者靜 知者樂 仁者壽)를 풀어 ‘지혜로운 사람의 즐거움은 물과 같고 어진 사람의 즐거움은 산과 같다’(知者樂 水 仁者樂 山)고 해석하지 못했다.

◆조선성리학의 부끄러운 민낯 ‘화냥년’

주자 도그마에 빠진 조선 성리학자들은 ‘이단’을 공격하는 데 힘을 쏟았다. ‘객관적 진실’보다는 편가르기에 나서 상대방 흠집내기에 바빴다. 그것이 살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임진왜란(1592년) 발발 3년 전 일어난 기축사화(정여립 모반사건)와 왜적의 침략 가능성에 대한 김성일과 황윤길의 엇갈린 보고가 대표적이다.

나라가 거의 쓰러진 6년간의 임진·정유왜란을 겪고도 그들은 반성하지 않았다. 유성룡이 <징비록(懲毖錄)>이란 반성문을 썼지만 글뿐이었다. ‘명·청 등거리 외교’로 전쟁의 재앙을 피하려던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세우는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뒤 싸움 준비도 하지 않은 채 ‘숭명반청’(崇明反淸)을 외치다 정묘·병자호란을 자초했다.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번 절하고 아홉번 머리를 땅에 두드리는 ‘삼배구고두’를 당했어도 그들은 민생 살리기와 국정쇄신보다는 예송논쟁에 사로잡혔다. 이 과정에서 윤휴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송시열마저 사약을 받는 아이러니를 자초했다.

‘주자 신’에 씌인 조선 성리학자들이 그들만의 권력쟁탈전을 벌일 때 ‘화냥년’이라는 한맺힌 피해자들이 양산됐다. ‘서방질하는 정숙하지 못한 여자’를 뜻하는 이 말은 병자호란이 끝난 뒤 만들어졌다. 인조가 치욕적인 항복을 한 뒤 청군은 무수한 양민을 잡아갔고 이 가운데는 여성도 상당수였다(일부에서 포로가 50만~60만명이라고 하는데 당시 조선의 인구가 600만~700만명으로 추정되는 것을 감안할 때 불가능한 규모다).

문제는 포로로 끌려갔다 되돌아온 여성들 즉 ‘환향녀’(還鄕女)였다. 부인과 딸마저 지키지 못한 그 잘난 성리학자 사대부들은 청에서 풀어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정절을 지키지 못해 몸이 더럽혀졌다는 이유를 댔다. 심지어 인조가 서대문 밖 개울에서 몸을 씻으면 정절을 회복한 것으로 본다는 조칙을 내기까지 했다.

‘널리 구제한 시내’(弘濟川)이라는 뜻의 서대문 밖 홍제천은 당시 만들어진 이름이다. 하지만 주자식 흑백론에 무젖은 그들은 막무가내였다. 결국 갈 곳을 잃은 상당수 환향녀는 다시 적지인 청으로 돌아가거나 서대문 밖에 남아 힘겨운 삶을 이어갔다. 그 중 일부는 몸을 파는 창부가 돼 목숨을 부지했고 결국 화냥년이란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스스로 소멸한 패치워크 문화대국’, 

사소한 끊어 읽기 하나 허용하지 않았던 조선 성리학자들의 편협성은 ‘내 것을 바탕으로 삼고 앞선 외국문물을 참작해 받아들이는 패치워크’(짜깁기)로 이룩한 세종의 문화대국을 고작 100여년 만에 날려버렸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고(1492년), 네덜란드·영국·프랑스가 동인도회사를 세워 동양진출을 적극화하는(17세기 초) 동안 조선은 사화와 예송논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유형원·유수원·정약용 등의 ‘실학자’가 나오고 홍대용·박지원·박제가 등 ‘북학파’가 나오긴 했다. 그러나 그들의 이론마저도 ‘주자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데다 숭명에서 숭청으로 바뀐 ‘신사대주의’에 머물며 조선 주체성을 잃었다는 점에서 근본적 한계가 있다.

<논어> ‘향당’편에 공자의 주량과 관련된 표현이 있다. ‘唯酒無量不及亂’(유주무량불급란)이 그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끊어 읽느냐에 따라 뜻이 많이 달라진다. ‘唯酒無量 不及亂’는 “오직 술에는 양 없이 드셨다. 하지만 흐트러짐(술주정)에는 이르지 않았다”는 전통적 해석과 ‘唯酒無量 不及 亂’라는 “오직 술에는 양 없이 드셨다. 술이 모자라면 난리를 쳤다”는 우스갯소리다.

‘공자님 말씀’을 갖고 농담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울 수 있다. 하지만 사상은 이런 불경 속에서 발전한다. 기존 이론 위에 다른 이론을 자유롭게 세우고 토론할 수 있어야 사상이 앞서고 경제와 문화의 발전도 이끌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살고 있는 걸까.

☞ 본 기사는 <머니S> 제556호(2018년9월5~11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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