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 ⑪ 다산 정약용 깊게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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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어떻게 식민지배와 6·25전쟁으로 인한 자산파괴를 단기간에 극복하고 세계 10대 경제대국과 민주화를 달성했을까. 삼성전자는 어떻게 반도체와 휴대폰에서 세계 1위가 됐고 방탄소년단은 어떻게 빌보드차트 1위에 올라 K-Pop 열풍을 전 세계로 확산시켰을까.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한 것으로 당연시됐던 일이 기적처럼 현실이 되는 배경엔 무엇이 있을까. ‘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에선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우리의 인문학적 바탕을 찾아본다. -편집자-
다산 정약용 /사진=클립아트

“슬프다! 뜻있는 선비들이 천고치란의 변동에 달통하고 한 시대의 경국제세 재주를 품고도 당시에 쓰일 수 없어 마침내 연기처럼 사라져 들을 수 없으니…”(<황성신문> 1899년 4월18일자 논설).

“근일 올린 유수원의 책자를 어제 다 읽어보았는데… 그중에는 우활해 행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으니 <우서(迂書)>라고 이름한 것은 참으로 옳다…”(<승정원일기> 영조13년(1737년) 10월28일).

위 두 인용글은 우리가 ‘근대화 개혁사상’으로 배운 실학을 각각 달리 평가한다. 조선의 근대화를 이룰 수 있는 실학의 인재가 많았음에도 ‘당파싸움’ 등으로 쓰이지 못했다는 주장과 문장으로는 그럴 듯하나 실제 정책으로 쓸 만한 것이 거의 없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실학이 쓰일 기회가 없었다고?

‘실학의 신화’를 만드는 데 앞장섰던 황성신문은 위 논설이 나간 한달 뒤인 5월18일자에 한발 더 나아간 논설을 실었다. “농서를 읽든지 상공학을 보는 자는 노예로 보니 반계 유형원과 성호 이익, 다산 정약용 같은 일대 경제 대방략가가 나왔으나 모두 이도로 지목해 산속에서 늙어 죽은 이도 있고 먼바다로 물러간 이도 있어… 백성의 빈곤과 국가의 약세에 이르렀으니 아! 슬프다.”

이런 논조는 일제강점기 때 다산의 현손인 위당 정인보 선생을 거쳐 더욱 강화됐다. 실학이 제대로 정책에 반영됐더라면 조선은 근대화에 성공했고 일제에 나라를 강탈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시사’가 퍼졌다.

하지만 역사는 그렇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탕평군주로 유명한 영조와 정조 때 임금과 관리들이 허목의 <기언>과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읽고 언급한 사실이 승정원일기와 실록에 기록돼 있다. 특히 영조 때는 왕명에 따라 국비를 들여 <반계수록>을 간행, 사고에 보관하기도 했다. 정조가 수원에 화성을 건설한 것도 반계의 생각을 수용한 것이었다.

고종도 다산의 저작을 열독했다. 황현은 <매천야록>에서 “고종은 변법경장을 서두르며…을유(1885년)․병술(1886년) 사이에 <여유당집>을 올리도록 명했다. 금상께서는 다산과 동시대가 아님을 개탄했다. 이후 다산의 증손 정문섭을 대과에 발탁했다. 지금 13부제를 실시한 것은 다산의 뜻을 실현한 것”이라고 기록했다.

이처럼 조선 위정자들은 실학자와 그들의 저술에 관심을 기울였지만 당시 직면한 문제해결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판단, 채택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근대화 관점에서 본 다산 사상의 한계

다산은 공자와 맹자의 수사학(洙泗學)으로 되돌아가 주희 성리학을 뛰어넘겠다며 다양한 저작을 남겼다. 하지만 그는 당시 앞섰던 청의 대진(戴震)의 계몽유학이나 서양의 사상을 접하지 않은 채 성리학 테두리 안에 머문 한계가 있었다.

우선 신분제 유지를 강력히 주장했다. “족(族)에는 귀천이 있으니 마땅히 그 등급을 변별해야 하고 세(勢)에는 강약이 있으니 마땅히 그 실정을 살펴야 한다. 이 두가지는 어느 하나도 폐할 수 없다”고 <목민심서>에 썼다.

다른 글에서는  “일국을 통털어 모두 양반이 된다면 양반이 없어질 것이다. 젊은이가 있어 어른을 드러내고 천한 자가 있어 귀한 자를 드러낸다”고도 했다.

순조가 즉위하면서 정조의 유지를 받들어 노비를 해방시켰음에도 다산은 중세 신분제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둘째 반근대적이며 봉건적인 상업억압론을 펼쳤다. 그는 “지금 농업을 올리고 싶으시면 말업을 억압하십시오. 그러면 농업은 스스로 높아집니다… 지금은 말업이 본업을 짓밟은 지가 오래됐습니다”라며 억상존농론을 견지했다.

이는 <주역>에서 “해가 중천에 뜨면 시장을 열어 천하의 백성을 오게 하고 천하의 재화를 모으며 교역하고 물러나 각각 제 것을 얻는다”고 밝히고 <중용> ‘구경대법’에서 “백공을 오게 하면 재용이 풍족해진다”고 강조한 공자의 상공업 중시에 어긋나는 것이다. 특히 1776년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 간행 이후 상공업을 중시하던 서유럽과 너무 다른 시대착오적인 주장이었다.

셋째 근대적 정치철학의 결여였다. 다산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서경>의 언급에 따라 영·정조 이래 발전된 ‘백성의 나라’라는 민국(民國)이란 말을 쓰지 않았다. 또 <논어>에 나오는 ‘인위적으로 억지함 없이 다스린다’는 무위이치(無爲而治)와 왕의 군림권(reigning authority)과 육조판서(내각)의 통치권(governing power)을 구분한 ‘유천하이불여’(有天下而不與)도 깨닫지 못했다, 

특히 다산은 공자와 맹자가 쓰지 않았던 목민(牧民)이란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정치를 ‘백성을 소나 양처럼 치는 것’으로 여겼다. 맹자가 인목(人牧)이라는 말을 쓰기는 했지만 그것은 ‘사람을 가축처럼 기르고 부리고 죽이기를 좋아하는 불인한 치자’를 지목한 것이다.

또 <서경>에 ‘12목’ ‘사목’ ‘목부’라는 용어가 나오지만 이 목은 다스린다는 뜻이 아니라 천자가 다스리는 읍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이라는 뜻이다. 다산이 맹자에 나오는 목여추(牧與芻·목초지와 꼴)를 추목(芻牧)으로 줄여 목민으로 비유한 것은 견강부회와 다름 아니다.

◆‘주자학 멍에’에 갇힌 다산

다산이 관직에 있을 때나 유배지에서 광범위한 저술활동에 전념하던 시기는 세계사적으로 엄청난 변혁기였다. 청은 건륭제 전성기가 끝나고 가경-도광제의 내리막으로 들어섰고 서양에서는 미국의 독립전쟁과 국부론 출판이 이어지면서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이 시기는 1000년 이상 지속됐던 동양 우위가 무너지고 서양이 군사·경제·사상·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앞서 나갔다는 점에서 ‘제2축의 시대’라고 할 수도 있다.

이 중요한 시기에 조선에는 다산 정약용과 실학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주희 성리학의 한계를 인식하고 공맹유학으로 조선을 개혁할 사상을 제시하고자 했다. 하지만 ‘주자학의 멍에’를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진정한 근대사상을 제시하지 못했다.

자칫 잘못하면 그들을 죽음으로 몰고 갈 수 있는 족쇄에 묶여 앞서 나가는 사상을 알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스스로 가진 강점이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도 약했다. 지금의 나와 앞선 남의 것을 비빔밥처럼 짜깁기하는 패치워크를 할 수 없었던 실학은 말만 번성한 ‘신화’로 남아 있다. 이제 그 신화를 벗어나야 한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57호(2018년 9월12~18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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