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장님 TMI에 갑분싸"… 한글파괴와 언어유희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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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식체·야민정음·줄임말… 세종대왕 반응이 궁금해 

제572돌 한글날을 하루 앞둔 8일 오후 서울 광화문 광장 세종대왕 동상 뒤로 한글날을 경축하는 문구 중 '한글'이 보이고 있다./사진=뉴시스

# “그건 티엠아이(TMI‧Too Much Information) 아닐까요?” 직장인 김정환씨(45)는 최근 후배 직원과 대화 도중 의문의 단어를 들었다. 과도한 정보라는 의미의 줄임말, ‘TMI’였다. 김씨는 “줄임말 하나를 배우면 또 하나가 생겨나더라. 신조어가 너무 많아 따라가기 벅차다”며 “세종대왕님이 요즘 젊은이들의 대화를 들으면 노하실 것”이라고 지적했다.

줄임말은 언어의 경제성에 따른 현상이다. 대중들은 언어를 전달하는 데 드는 시간과 에너지를 줄이기 위해 약칭 등 줄임말을 사용해왔다. 수능(대학수학능력시험), 노조(노동조합), 전경련(전국경제인연합회) 등은 이미 줄임말이 보통명사로 굳어진 경우다.

하지만 비교적 최근에 생긴 줄임말은 그 의미를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줄임말뿐만 아니라 야민정음, 급식체 등 각종 신조어가 난무하면서 현대인들의 언어 사용에 변화가 찾아왔다. 이를 두고 언어파괴라는 부정적 시각과 언어유희라는 긍정적 시선이 교차한다. 9일 572돌 한글날을 맞아 한국어 변형 실태를 조명해봤다. 

◆신조어 어디까지 왔나

신조어는 2000년대 초반 인터넷의 보급과 함께 진화했다. 인터넷 등장 초기 네티즌들은 타자를 빨리 치기 위해 초성만 사용하기 시작했다. ‘ㅇㅇ(응응)’, ‘ㄴㄴ(노노)’, ‘ㄱㅅ(감사)’, ‘ㅈㅅ(죄송), ‘ㅊㅋ(축하)’ 등이 그것이다.

이후 인터넷 채팅에서 사용하던 ‘즐~(즐겁게 ~해라)’, ‘헐(황당하거나 어이가 없을 때 쓰는 감탄사)’ 등이 일상 대화에도 등장했다. 스마트폰과 SNS가 생긴 뒤로는 신조어가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특히 줄임말은 그 수가 많아지면서 ‘별걸 다 줄인다’는 의미의 ‘별다줄’이라는 단어까지 생겼다. 

신조어가 또 다른 신조어를 낳는 사례도 있다. ‘갑분싸(갑자기 분위기 싸해짐)’라는 줄임말은 분위기에 따라 ‘갑분O(갑자기 분위기 OOO)’ 등으로 응용이 가능하다. 영어 알파벳을 이용한 줄임말도 있다. ‘JMT’는 신조어 ‘존맛탱’의 영어 약칭으로 ‘존맛(존X 맛있다)’이라는 비속어에 강조의 의미 ‘탱’을 합한 단어다.

대전대 학생들이 지난 2015년 12월에 ‘야민정음’ 사례를 모아 만든 현수막. /사진=온라인 커뮤니티

신조어는 주로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탄생한다. 지난 2014년 디시인사이드 야구갤러리에서 시작된 ‘야민정음(야구갤러리+훈민정음)’이 대표적이다. 야구갤러리 유저들은 포털에서 유입되는 일반 사용자를 걸러내기 위해 그들만의 언어를 쓰기 시작했다. 

원리는 비슷한 모양의 한글 자모를 바꾸는 것. 예컨대 ‘멍멍이(강아지)’를 ‘댕댕이’로, ‘귀엽다’를 ‘커엽다’로, ‘명작’을 ‘띵작’으로 대체하는 식이다. ‘머’와 ‘대’, ‘귀’와 ‘커’, ‘명과’ ‘띵’ 등의 글자 모양이 비슷한 점에서 착안했다. 또 ‘룸곡옾눞’와 같이 ‘폭풍눈물’을 위아래로 뒤집은 단어도 있다. 

10대 청소년들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간다. 급식을 먹는 10대들이 쓰는 말인 ‘급식체’의 탄생이다. 급식체를 쓰려면 발음이 비슷한 단어들을 나열하면서 느낌을 살리면 된다. 이를테면 ‘동의? 어 보감’, ‘실화냐? 다큐냐? 맨큐냐?’, ‘이거레알 반박불가 빼박캔트 버벌진트 버캔스탁인 부분’, ‘오지고 지리고 렛잇고’ 등이 있다. 이는 동의를 구하거나 사실을 강조하는 말로, 각각의 단어가 뚜렷한 의미를 갖지는 않는다. 

급식체는 SNS를 통해 확산되면서 10대는 물론 2030세대를 사로잡았다. 온라인에서는 누가 더 길고 재밌게 급식체를 구사하느냐는 경쟁 구도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나아가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급식체 특강’이라는 개그 코너가 방송됐고 기업에서는 급식체를 활용한 광고를 만들었다. 

'SNL 코리아 시즌 9'에서 방송된 급식체 특강. /사진=tvN 'SNL 코리아 시즌 9' 방송화면 캡처

◆유행따라 신조어 쫓는 어른들

신조어에 대한 여론은 엇갈린다. 젊은이들은 신조어를 세련된 표현이자 재밌는 현상이라고 인식한다. 특히 신조어는 유행에 뒤처지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는 수단이 된다. 고등학생 최지민양(17)은 “신조어를 모르면 친구들 사이에서 ‘문찐(문화 찐따‧유행에 느리다는 뜻)’ 취급을 당할 수 있다”고 밝혔다. 

2030세대 역시 이 같은 유행을 따른다. 과거 2030세대 사이에서는 청소년들만의 은어를 교화하려는 분위기가 나타났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들이 오히려 10대의 유행을 쫓는다. SNS에는 ‘급식체를 잘 안다’는 식의 자랑글이나 ‘신조어 테스트에서 고득점을 획득했다’는 식의 인증글이 넘쳐난다. 신조어를 통해 젊은 감성 혹은 젊어지고 싶은 욕망을 채우는 것이다. 

직장인 이수연씨(28)는 “JMT 등의 신조어는 유행어처럼 쓰인다. 다들 쓰니까 나만 안 쓰면 뒤처지는 기분”이라며 “처음엔 이상하지만 익숙해지면 의미전달이 편하고 재밌다”고 말했다.

반면 기성세대는 세대 간 소통 단절을 우려한다. 직장인 김희성씨(50)는 “젊은세대가 기성세대와 선을 긋기 위해 은어를 만들어 쓰는 것 같다”며 “대중매체에서도 신조어를 쓰는 경우가 많은데 종종 소외감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신조어가 주로 젊은층에서 사용된다는 점에서 세대 간 괴리가 생길 수밖에 없다. 국민대통합위원회가 지난 2015년 청소년이 주로 쓰는 단어의 인지도를 조사한 결과 세대별 격차가 뚜렷하게 나타났다. ‘노잼(No+재미. 재미없다는 뜻)’을 알고 있는 60대 이상은 3.7%, 50대는 16.7%에 불과했다. 10대 청소년의 부모세대인 40대도 뜻을 안다(41.5%)는 답이 절반도 안됐다.

지난해 571돌 한글날을 맞아 서울 종로구 광화문광장 세종이야기를 찾은 시민들이 전시관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뉴시스

◆언어파괴인가 언어유희인가

언어 자체에 대한 의견도 분분하다. 특히 요즘 신조어는 욕설이나 혐오의 뜻을 포함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된다. 부정적 어감과 의미를 지닌 ‘개~, 핵~, 존~, 씹~’이라는 말은 각종 단어 앞에 붙어 강조의 의미를 더한다. 또 좋다는 의미의 ‘앙 기모띠’라는 유행어는 일본 포르노에서 주로 사용되는 단어로, 한 인터넷방송 BJ를 통해 신조어로 자리잡았다. 

주부 한미영씨(45)는 “노인을 비하하는 ‘틀딱충(틀니 딱딱+벌레충)’처럼 신조어에 혐오 표현이 많아 듣기 거북하다”며 “어휘력과 문장력을 고려할 때 청소년들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 같다”고 지적했다. 

중학교 담임교사 박혜준씨(26)는 “은어를 사용하는 건 10대의 또래문화로 이해할 수 있지만 급식체의 경우 어감이 상당히 좋지 않다”며 “무분별한 단어 파괴도 우려스럽다”고 전했다. 

반면 언어의 확장성 측면에서 긍정적이라는 의견도 있다. 직장인 정유진씨(30)는 “기존 언어를 다양하게 활용하고 변화시키는 건 파괴가 아닌 번영이라고 봐야할 것”이라며 “오히려 세종대왕이 보기에 좋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조재형 전남대학교 국문과 교수는 “신조어는 유행처럼 사용되다 사라지는 경우가 많다”며 ”한국어를 깨뜨리는 것이라기보다는 언어 사용에 새로운 충격을 주고 나아질 수 있는 긍정적 신호로 본다”고 밝혔다. 



 

김경은 silver@mt.co.kr

머니S 생활경제부 김경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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