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 ‘창씨개명과 도로명주소’의 몰역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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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어떻게 식민지배와 6·25전쟁으로 인한 자산파괴를 단기간에 극복하고 세계 10대 경제대국과 민주화를 달성했을까. 삼성전자는 어떻게 반도체와 휴대폰에서 세계 1위가 됐고 방탄소년단은 어떻게 빌보드차트 1위에 올라 K-Pop 열풍을 전 세계로 확산시켰을까.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한 것으로 당연시됐던 일이 기적처럼 현실이 되는 배경엔 무엇이 있을까. ‘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에선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우리의 인문학적 바탕을 찾아본다. -편집자-
도로명주소 /사진=머니투데이DB

히라야마 야키치와 히라누마 도쥬. 이 두사람은 우리의 아픈 역사를 되새김질하게 한다. 히라야먀 야키치는 신동엽 시인의 어릴 적 일본식 이름이고 히라누마 도쥬는 윤동주 시인이 일본 유학 때 쓰던 이름이다.

신동엽은 부여초등학교(당시 부여공립진죠소학교) 4학년 때인 1942년, ‘내지 성지 참배단’으로 뽑혀 학생 500여명과 함께 보름 동안 일본을 다녀왔다. 당시는 일제가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뒤 조선사람을 군대와 노동자로 강제로 끌고갔던 때여서 신동엽도 창씨개명할 수밖에 없었다.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지 않으면 대표단에 뽑힐 수 없었던 사정이 있으나 그는 두고두고 이를 가슴아파했다.

윤동주는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다 일본으로 유학해서 시를 공부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창씨개명했다. 시가 너무 좋아, 아름다운 시를 쓰기 위해 ‘파평 윤씨’라는 역사마저 스스로 저버리는 고통까지 감수했다. 하지만 일본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조센징’으로 부르는 차별이었다. 결국 그는 시보다 조국 독립을 위한 운동에 나섰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체실험대상이 돼 28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했다(영화 <동주>).

◆일제의 창씨개명이 동화정책이라고?

일제는 불법적으로 강점한 조선과 타이완에서 사람들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으로 바꾸는 창씨개명을 강압적으로 시행했다. 조선인이나 타이완 사람을 일본민족으로 흡수해 동화시킨다는 듣기 좋은 명분을 내세웠다. 하지만 실제로는 일본인과 차별하기 위한 것이었음이 드러났다.

“성을 일본식으로 바꾸면서 진정한 일본인에게는 별로 없는 성을 붙이게 했다. 창씨개명 뒤에도 원래는 조선인(타이완인)이었던 것을 쉽게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조선이나 타이완의 친족체계는 근세중국과 동일한 부계 혈연 네트워크 방식이라 멀리 떨어져 살아도 성과 본이 같은 이들 사이의 유대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래서는 식민통치가 쉽지 않기 때문에 강제로 새로운 성을 만들어서 부계 혈연집단을 약화하는 것이 창씨개명의 진정한 목적이었다.”(요나하준 지음, 최종길 옮김, <중국화하는 일본>, 183쪽). 창씨개명의 목적은 ‘개명’이 아니라 ‘창씨’에 있었다는 지적이다.

친일파들은 이 같은 총독부 정책을 그대로 받아들여 창씨개명에 적극 나섰다. 춘원 이광수가 가야마 미쓰로로, 미당 서정주가 다츠시로 시즈오로 바꾼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똑똑한 우리 조상들은 일제의 이런 잔꾀를 꿰뚫어봤기 때문에 목숨 걸고 창씨개명에 반대했다(일제가 강제로 실시한 단발령(1895년)에 ‘내 목은 잘라도 머리를 자를 수 없다’며 적극 반대한 것도 이런 정신에 따른 것이었다).

신동엽 하면 이름만 들어도 평산 신씨의 가계도가 그려지고 신숭겸 장군 등 역사적으로 명성을 떨친 조상들이 떠오르며 강한 유대감이 들지만 히라야먀 야키치라고 바꾸면 그런 역사가 순식간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일제는 사람 성과 이름을 강제로 바꾸도록 하는 창씨개명의 야만행위를 하기 전에 조선의 마을 이름도 마구 바꿨다. 한성을 경성으로 바꾸고 흥인지문 밖의 인창방과 숭신방을 합해 창신동을 만들어 내기도 했다. 또 한밭을 대전으로, 삼개를 마포로 바꾼 것처럼 아름다운 우리말 지명을 한자로 바꿨다. 모두 우리의 유구한 역사를 지워 식민지배를 쉽게 하려는 것이었다.
도로명주소 /사진=뉴시스DB

◆도로명 주소는 현대판 ‘창씨개명’

행정구역과 마을 이름은 역사와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필자가 태어나 고등학교 때까지 살았던 ‘충남 아산군 음봉면 산동리(뫼골)’는 “용와산 남향 쪽으로 위치한 계곡이 많고 산세가 복잡한 산골이라 뫼골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임진왜란 때 낙향한 사람들이 정착해 형성된 마을”이라는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런데 도로명 주소에 따라 ‘충남 아산시 음봉면 월산로’로 바뀌었다. 월산로라는 이름을 가진 길도 마을도 없었는데 갑자기 뚱딴지같은 이름을 만들고 옛 이름을 없애버렸다(굳이 유추해보자면 월산리는 산동리 너머에 있는 월랑리와 산동리를 잇는 길이라는 뜻일 것이다).

필자가 2002년부터 지금까지 살고 있는 ‘서울시 강남구 대치4동’은 ‘서울시 강남구 삼성로와 역삼로’로 분할됐다. 자그마한 길 하나 사이로 함께 사는 ‘생활 공동체’가 하루아침에 ‘다른 동네’로 변질된 것이다.

참으로 ‘행정’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는 ‘폭력’이라고 할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2014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는 ‘도로명 주소’가 현대판 창씨개명의 성격도 갖고 있다는 점이다. 도로명 주소에서 사용되는 도로명의 상당수가 그전까지 쓰였던 마을 이름과 동떨어진 것이 많아 역사를 단절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이는 도로명 주소를 시행하면서도 토지대장이나 등기부에는 여전히 이전의 지번주소를 그대로 쓴다는 점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스스로 역사 지우는 ‘도로명 주소’

도로명 주소를 시행하면서 내세운 것이 ‘선진국’에서 사용하는 도로명 주소를 씀으로써 생활이 편리해지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른바 선진국과 우리는 역사와 현실이 다르다. 도시와 마을이 만들어질 때 길과 도로가 먼저 만들어 진 뒤 집과 상가가 들어선다면 도로명 주소가 편리하다.

그러나 도로가 만들어지기 전부터 자연발생적으로 집들이 들어서 올망졸망한 골목이 맛깔스러운 서울 인사동과 익선동, 북촌 등은 도로 이름을 새로 만들어 도로명 주소를 쓰면 곤란한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도로명 주소가 시행된 지 5년 가까이 되지만 여전히 불편한 것은 이와 관련이 깊다.

우리는 일제가 총칼로 위협하며 없앴던 ‘설’을 되찾았다.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창씨개명도 목숨으로 거부했다. 스스로 머리를 자르더라도 일제의 강압에 의해선 절대 자르지 않는다는 정신을 잃지 않은 덕분으로 36년이란 길고 긴 식민지배를 극복해 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잘못된 역사를 반성하고 빛나는 역사를 더욱 발전시키는 온고지신이야말로 멋진 미래를 만들어 내는 올바른 패치워크(짜깁기, 접붙이기)이다. 도시계획에 따라 도로 먼저 만들고 입주가 시작된 신도시에는 도로명 주소를 쓰되, 역사와 전통이 진하게 배어있는 전통 마을은 예전 지번주소를 그대로 쓰는 절충은 불가능한 일일까.

☞ 본 기사는 <머니S> 제569호(2018년 12월5~11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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