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칼럼] 치매의 현실, '감동 엔딩'은 없다

 
 
기사공유

오랜만에 만난 지인이 살이 많이 빠져 왜 그런가 물었더니, 연로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고 짧게 대답했다. 답변에 이해가 안 가서 자세히 물어보니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살이 빠진 게 아니라 중증 치매로 몇 년간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그동안 정신적·신체적으로 워낙 힘들어서 살이 빠진 것이었다.

생업에도 지장이 많았던 것 같다. 치매 환자 본인만이 아니라 그 가족이 겪는 고통이 암 환자 가족이 겪는 고통보다 때로는 더욱 심한 경우도 있다. 겪어본 사람만이 안다고 할 수 있겠다. 고령화 사회로 들어서면서 치매환자가 있는 가정에서는 장수시대가 축복만은 아님을 실감하게도 된다.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심리

지난 2월20일 청주시 한 아파트 인도에 49세 남성이 투신해 피를 흘리며 쓰러진 것이 발견됐는데 ‘아버지를 데려간다’는 내용의 유서를 남겨 그 상황을 알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85세인 아버지는 목 부위가 뭔가에 눌린 흔적을 남기고 집에서 숨져 있었다. 시신의 부패가 심하지 않아 사망한 지 얼마 안 된 것으로 추정됐다. 아들은 서울에 살다가 치매 증상을 앓는 아버지의 병간호를 위해 10년 전 가족과 떨어진 채 홀로 청주에 내려와 아버지를 모시고 생활했다고 한다. 유족의 말에 따르면 아들도 오랜 병간호로 최근 몸 상태가 나빠지면서 아버지가 정신적으로 더욱 힘들어했다고 한다.


영화 <한오치>.

치매를 앓던 아내의 부탁에 자기 손으로 아내의 목을 눌러 죽인 후 아내의 소원을 들어주고는 뒤따라 죽으려 했던 전직 형사 이야기인 영화 <한오치>가 제7회 재팬파운데이션 무비 페스티벌(2019년 3월22~31일,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상영됐다. 원작 소설(작가 요코야마 히데오)은 일본에서 30만부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로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줬다. 사사베 기요시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제28회 일본아카데미상에서 작품상과 남우주연상을 석권했다. 제목 한오치(Half A Confession)는 경찰용어로 용의자가 용의사실의 일부만 자백한 상태를 말한다. 주인공 가지 소이치로는 사랑하는 아내를 죽인 후 2일 동안의 행적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이야기는 ‘수수께끼의 이틀간’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형식으로 전개된다. 아내의 간병을 위해 형사생활을 그만두고 경찰학교에서 후진을 양성하며 존경받던 그가 왜 아내를 죽였는지, 아내의 어떤 소원을 들어주었는지가 밝혀지게 된다. 일본 내에서만 1800만달러의 수입을 올리며 호평 속에 상영됐지만 눈물을 자아내고 가슴을 저미게 하는 한국적 대중성이 부족해서인지 한국의 개봉관에서는 상영되지 않았다. 재력 있는 영화 수입·배급사는 흥행에 자신이 없어도 관객을 깊이 생각하게 하는 좋은 작품은 기업의 사회공헌 차원에서라도 대중에게 볼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

치매환자와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는 고령화 사회에 일찌감치 들어선 일본에서는 많이 나왔는데 한국에서는 근래 들어 많이 나오는 편이다.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송호영, 82세)와 남편을 돌보는 할머니(이일순, 71세)가 직접 출연한 <기억>의 시사회가 4월1일 경남 메가박스 거창점에서 개최됐다.

이 영화에 전문배우는 한명도 안 나오고 거창군 신원면 수옥마을 전 주민이 배우 역할을 했다. 치매에 걸린 노부부와 마을주민 사이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소재로 시나리오 속 실제 인물들이 출연해 찍은 특별한 영화다. 송씨 할아버지는 건강이 안 좋아 시사회에 참석하지 못하고 부인만 참석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기억>은 5월에 개막하는 전주국제영화제에 출품될 예정이다.


영화 로망. /사진제공= ㈜메리크리스마스

◆고령사회에 닥치는 미결의 문제

부부 동반치매를 소재로 한 최초의 영화 <로망>이 지난 3일 전국에서 개봉됐다. 결혼 45년차 부부 할아버지 조남봉(이순재 분)과 할머니 이매자(정영숙 분)는 함께 백지장 기억을 선고받은 뒤 둘만 남은 집에서 문을 걸어 잠그고 서로를 보살핀다. 둘만 남겨진 세상에서 그들은 번갈아가며 기억을 잃는다. 기억이 다시 돌아올 때마다 ‘미안하다’, ‘고맙다’는 등의 애틋한 고백을 적은 메모지를 벽에 붙여 두고 서로를 기다린다.

치매로 인해 매일 기억이 흐릿해지지만 먹고사느라 잊었던 로망은 점점 더 선명해진다. 노부부의 삶의 애환과 아릿한 로맨스가 따스하게 느껴지는 동시에 마음이 시큰하게 아려오는 명장면과 명대사들도 나온다. 평생 무난하게 지내온 듯싶었는데 기억이 뒤죽박죽 섞이기 시작하면서 과거의 상처들이 떠올라 지나온 인생의 고통들을 되짚어 벌 받는 듯한 절망에 빠진다. 조남봉은 “울퉁불퉁 자갈길을 열심히 달리다 보면 보상받을 줄 알았는데 세월이 오리발 내밀고 인생의 뒤통수 치네”라며 한탄한다.

동반치매는 영화 <로망>에서 최초로 다뤄졌지만 현실적으로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미국 유타주립대 노인의학연구팀에 따르면 부부의 한쪽이 치매를 앓으면 그 배우자는 그렇지 않은 배우자들보다 치매 발생 위험이 6배 높게 나타난다고 한다. 생활습관을 오랜 세월 공유했고 배우자 간병으로 인해 육체적·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하기 때문이다. 치매에 걸린 남편의 아내는 치매 위험이 3.7배 높고 치매에 걸린 아내의 남편은 치매 위험이 무려 11.9배나 높아진다. 고령화시대에 함께 장수하는 부부가 늘고 있으므로 동반치매를 남의 일로만 여길 것이 아니다. 오래 살고 싶다면 부부 동반치매에도 대비해야 하며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치매에 걸리지 않기 위한 노력을 미리부터 기울이는 것이다.

KBS2 TV 주말연속극 <같이 살래요>(2018년 3월17일~9월9일)에서는 평생 돈과 성공을 위해 달려온 미연(장미희 분)이 36년 만에 효섭(유동근 분)과 재회해 진정한 사랑을 찾으면서 치매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는다. 행복한 황혼기를 꿈꿔야 할 시기에 나타난 치매는 두 사람의 감정을 더 애절하게 만들며 가족과의 갈등을 극적으로 풀어 가도록 한다. 관록 있는 두 남녀 배우의 황혼 로맨스 연기로 최고시청률 36.9%(닐슨코리아)를 기록했다. 치매가 주된 이야기로 등장하면서도 2060 전 세대를 아우르는 진정한 가족애가 그려진 가족 로맨스 드라마라고 할 수 있겠다.

후속 KBS2 TV 드라마 <하나뿐인 내편>(2018년 9월15일~2019년 3월17일)은 최고시청률 49.4%를 기록하며 더욱 높은 인기를 얻었다. 치매 노인으로 박금병(정재순 분)이 등장하여 며느리를 볼 때마다 “첩년”이라고 외치며 머리를 쥐어뜯는다. 가족들은 참다못해 요양병원으로 보낸다. 노인이 가해자와 피해자의 극단을 오가며 보이는 모습은 치매보다는 차라리 다중인격 장애의 모습에 가깝다. 치매환자가 스토리 진행에 필요한 것만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행동하며 요양원에 가야 할 정도로 증상이 악화되면서도 신체능력은 전혀 떨어지지 않는 모습도 현실성이 없다. 치매증상이 악화되면 신체능력도 떨어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눈이부시게'. /사진제공=드라마하우스

◆사실과 허구 혼동해선 안돼

케이블TV tvN의 수목드라마 <아는 와이프>(2018년 8월1일~9월20일)에서는 주인공 서우진(한지민 분)의 엄마(이정은 분)가 치매환자다. 엄마는 계속 사고를 치며 딸을 곤란하게 만든다. 드라마는 한번의 선택으로 달라진 현재를 살게 된 운명적인 러브스토리로서 젊은층의 호평을 받았다. 최고시청률은 8.2%를 기록했다.

가장 최근 TV에서 방영된 치매 드라마 <눈이 부시게>(JTBC, 2019년 2월11일~3월19일)는 시청률이 초기엔 3%대 초반이었으나 입소문으로 급격히 올라가 9.7%를 기록하면서 자체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시간이탈 판타지 로맨스’를 표방한 드라마로서 청춘의 상처와 노년의 고통을 고루 아울렀다는 평가를 받았다. 전반부에는 25세의 혜자가 시간을 되돌리는 시계로 인해 갑자기 70세로 늙어버리면서 젊음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준하(남주혁 분) 곁을 맴도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후반부에 가서 지금까지의 내용이 알츠하이머 치매로 인해 상상과 기억이 뒤섞여 나타난 허구였음이 드러나면서 극적인 반전을 이룬다. 마지막 회에서 어렴풋이 제정신이 돌아온 혜자가 인생을 되돌아보며 "지금을 망치지 말라. 오늘을 살아가라,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다"고 말하는 마지막 대사가 진한 감동을 안겨주었다.


치매가 현실에 밀착된 주제이다 보니 시청자들이 자칫하면 사실과 허구를 혼동하기 쉽다. 그러나 극적 재미를 위해 치매증상이 사실에서 크게 벗어나게 그려지는 경우가 있음에 유의해야 한다. 치매에 대한 실질적 이해가 부족한 상태에서 가정에 치매환자가 발생했을 때 가족은 더 힘들어지고 적절한 대응을 못하기도 한다. <눈이 부시게>의 경우는 주인공 혜자가 보이는 행태가 허구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실제 치매가 진행되는 환자들도 자신의 감정이 들어간 과거의 기억 시점과 현재의 상황들이 뒤섞이면서 현재와 과거를 착각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치매환자가 등장하는 드라마를 통해 치매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도 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88호(2019년 4월16~22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 0%
  • 0%
  • 코스피 : 2080.62하락 8.2423:59 10/23
  • 코스닥 : 658.98상승 3.0723:59 10/23
  • 원달러 : 1172.40상승 2.723:59 10/23
  • 두바이유 : 61.17상승 1.4723:59 10/23
  • 금 : 59.67상승 0.7223:59 10/23
  • image
  • image
  • image
  • image
  • image

커버스토리

정기구독신청 독자의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