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떠나는 LG폰, ‘리즈폰 영광’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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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전자가 국내에서 휴대전화를 생산한 지 30년 만에 완전히 철수한다. 16분기 연속 적자를 기록한 것이 그 원인이다. 이 기간 LG전자 MC사업본부가 기록한 적자만 3조원에 달한다.

LG전자 평택사업장에 근무하던 1400명은 창원공장을 비롯해 전국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생산설비 등은 올해까지 베트남 하이퐁 캠퍼스로 이전한다. 15년 전 LG전자의 휴대전화 생산 거점으로 등장했던 평택사업장의 꿈은 그렇게 사라졌다.


LG전자 하이퐁공장 전경. /사진제공=LG전자

◆내놓으면 히트… LG폰 전성기

LG전자는 1989년 ‘GHP-9C’라는 이름의 휴대전화를 선보이면서 모바일사업을 본격 시작했다. 당시 배터리는 400mAh(밀리암페어시) 수준으로 현재의 10분의1에 불과했으며 완전방전에서 완전충전까지 12시간이 걸렸다. 이어 1992년 일회용 알카라인 건전지와 충전용 배터리를 겸용하는 ‘GSP-100’을 출시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1990년대는 LG전자 휴대전화의 격동기였다. LG전자는 금성반도체, 금성통신, LG정보통신, LG전자 등으로 사명을 계속 변경했고 수많은 시도를 거쳤다. 1989년부터 1994년까지 총 10종의 휴대전화를 출시한 LG전자는 3개 모델을 자체 설계·제작하면서 생산 노하우를 쌓았다. 이 과정 속에 1996년 등장한 ‘LDP-200’은 세계 최초의 CDMA 이동전화에 이름을 올렸고 압도적인 점유율을 자랑하던 모토로라의 영역에 발을 담그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997년은 문자서비스기능을 포함한 PCS서비스가 본격 시작되면서 국내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이 빚어졌다. 2.5세대 이동통신기술의 등장과 함께 통신사업자는 기존 SK텔레콤, 신세기통신에 한국통신프리텔, 한솔PCS, LG텔레콤이 더해져 총 5개사가 이동통신시장을 두고 경쟁했다. 이통사 간 각축전이 벌어지며 시장은 규모가 커졌고 이를 기반으로 LG전자의 휴대전화사업도 성장했다.

LG전자의 휴대전화사업이 본격 성장한 것은 2000년대 들어서다. 2000년대 휴대전화 트렌드는 단순 통신기기에서 정보·엔터테인먼트의 도구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LG전자는 소비자들의 요구에 충실하게 응답했다. 2003년과 2004년 출시된 휴대전화 ‘LG-SV130’과 ‘LG-KP3000’은 각각 카메라와 음악재생기능에 중점을 뒀다. 이 중 MP3기능을 지원한 KP3000모델은 젊은층을 중심으로 인기가 있었다. 저장공간은 70메가바이트(MB)로 약 17곡의 MP3파일을 담을 수 있어 획기적인 수준이었다. 이 밖에 ▲130만화소의 CCD 카메라 ▲2.2인치 TFT 듀얼디스플레이 ▲64화음 스테레오 벨소리 ▲3D아바타 기능은 젊은층을 공략하기에 충분했다.

여기서 얻은 자신감으로 LG전자는 2005년 11월22일 역대급 히트를 기록한다. 바로 ‘LG-LP5900’. ‘초콜릿폰’의 등장이다. 초콜릿폰은 LG전자의 블랙라벨 시리즈 첫번째 휴대폰으로 검은 외관과 빨간 버튼으로 국내외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두께 14.9㎜, 2인치 QVGA 디스플레이의 디자인은 “다시 나오기 힘들 정도로 아름답다”는 평을 받았다. 제품에 대해 각종 불만이 제기됐으나 하루 실개통수 1000대를 넘기는 등 돌풍을 일으켰다.

LG전자의 돌풍은 2006년에도 이어졌다. ‘LG-LV4200’ 샤인폰은 플라스틱 단말기 일색이던 시장에서 스테인리스 소재로 확고한 위치를 점했다. 전면 미러 LCD와 스크롤키의 조합은 디자인과 편의성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고 출시 보름 만에 하루 실개통수 1500대를 돌파하면서 초콜릿폰의 계보를 이었다.

터치스크린이 각광받기 시작한 2007년에는 명품 브랜드 프라다와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프라다폰’을 출시했다. 프라다폰은 초콜릿폰과 샤인폰의 인기를 뛰어넘어 LG전자의 첫 밀리언셀러에 이름을 올렸는데 프라다폰의 디자인은 10년이 지난 현재까지 회자될 정도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왼쪽부터)샤인폰, 초콜릿폰, 프라다폰, LG V50 ThinQ. /사진제공=LG전자

◆될듯 하다 안되는 LG스마트폰

LG전자의 스마트폰이 짧은 전성기를 누리던 2007년 스티브 잡스가 청바지 주머니에서 아이폰을 꺼내면서 피처폰의 종말을 고했다. 당시 LG전자는 스마트폰 개발에 회의적인 반응이었는데 결정적으로 이것이 패착이 됐다.

뒤늦은 판단의 대가는 참담했다. 안드로이드를 개발한 구글과 손잡고 출시한 ‘안드로원’도 시장에서 소리소문 없이 사라졌다. 2011~2012년 국내 스마트폰 점유율을 팬택에 내주며 굴욕을 겪은 LG전자는 2012년 하반기 ‘옵티머스G’를 출시하면서 반등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때 LG전자는 스마트폰사업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는데 이 투자의 결실은 2014년 ‘G3’에서 맺어졌다. G3는 누적판매량 1000만대를 돌파하면서 후발주자의 설움을 단숨에 극복했다. MC사업본부는 G3가 출시된 2014년 3161억원의 흑자를 기록하면서 휴대전화 명가의 자존심을 되찾았다. G3는 ▲G3 Cat.6 ▲G3 A ▲G3 비트 ▲G3 스타일러스 ▲G 비스타 ▲GX2 ▲G3 Screen 등 수많은 변형기종으로 꾸준한 판매 실적을 기록했다.

영광은 그리 길지 않았다. G4부터 LG전자의 수난은 다시 시작됐다. 천연가죽 디자인의 G4와 미디어 기능에 집중한 V10은 메인보드 결함으로 스스로 전원이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LG전자는 뒤늦게 잘못을 시인하고 무상수리에 나섰지만 이미 소비자는 돌아선 뒤였다.

이후 단말기유통구조개선법(이하 단통법)의 여파와 과도한 혁신으로 ▲G5 ▲G6 ▲G7 ▲G8 ▲V20 ▲V30 ▲V40 등 플래그십 단말기사업이 붕괴됐다. 전문가들은 “LG전자 MC사업본부는 시장의 신뢰를 잃었음에도 소비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보다 시대를 앞서간 혁신으로 자멸을 초래했다”고 평가했다.

LG전자에게 5G는 재도약의 기회다. 업계는 LG전자가 생산거점 이동으로 수익성 개선 재정비 작업에 돌입했다며 5G에서 반전을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삼성전자, 애플, 화웨이, 샤오미 등 강력한 시장경쟁자들을 물리칠 수 있을 만한 한방이 있어야 한다”며 “가성비로는 중국기업에, 성능과 브랜드 이미지로는 삼성전자와 애플에 미치지 못하는 것이 LG전자의 가장 큰 고민일 것”이라고 말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91호(2019년 5월7~13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박흥순 soonn@mt.co.kr

<머니S> 산업1팀 IT담당 박흥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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