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 과학의 ‘앎’과 기술의 ‘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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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과 기술을 ‘과학기술’로 붙여 부르곤 하는데 필자는 이 단어가 불편하다. 하나로 함께 부르는 순간 과학이 기술에 종속된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과학과 기술(혹은 공학)이 무척 다르다고 믿는다. 과학이 알기 위한 것이라면 공학과 기술은 쓰기 위한 것이다. 쓰려면 알아야 하는 것은 맞지만 ‘앎’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씀’의 수단이 아니다. 과학기술로 붙여 쓰면 앎은 씀과 한몸이 돼 앎을 오로지 쓰기 위한 것으로 보이게 하는 착시를 만든다.

중세 우리말 문학을 연구하는 인문학자에게 이 주제가 4차 산업혁명과 경제발전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묻는 것은 모욕적이다. 우주의 비밀을 탐구하는 물리학자에게도 같은 질문은 무척 당혹스럽다. 필자는 과학은 공학보다 오히려 인문학에 가깝다고 믿는다. 둘 다 자연과 사회, 역사 안에서 인간의 존재를 이해하는 데 기여한다. 이런 이해가 전자제품의 설계에 도움을 줄 수 있고 도움을 주길 바라지만 특정 전자제품을 만들기 ‘위해’ 이해하려는 것은 아니다.

구한 말 서양과학은 자체의 가치가 아니라 과학이 만든 결과의 형태로 먼저 수입됐다. 문화로서의 과학이 아니라 구체적인 기술의 형태로 말이다. 과학은 ‘~을 위한’의 수식어가 동반된 어떤 것으로 여겨졌다. 공업 발전을 위해, 민족 개조를 위해 같은 식으로 말이다.

과학과 기술이 한몸이 된 결정적 계기는 1960~1970년대 국가주도 경제발전기다. 이상욱의 <과학은 이것을 상상력이라고 한다>에 어셈블리 라인 모형이 소개된다. 과학은 기술을 발전시키고 기술은 국가의 경제발전에 기여한다는 일차원적 모형이다. 개발 독재시기 경제발전에 힘입어 과학과 기술은 과학기술의 한몸으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인됐다. 헌법 127조도 ‘국가는 과학기술의 혁신을 통하여 국민 경제의 발전에 노력해야 한다’고 명시돼 있다. 헌법에서도 과학은 여전히 ‘~을 위한’ 수단이다.

오로지 ‘앎’을 추구한다고 해서 과학이 가치중립적인 것은 아니다. 물리학자가 매일 진행하는 연구는 가치가 개입될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많다. 오늘은 어떤 함수를 적분하고 내일은 그 결과를 이용해 어떤 수치를 계산하는 것 같은 일을 매일 되풀이한다. 좀 어렵긴 하지만 계산의 본성은 구구단 표를 이용해 3과 7을 곱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누가 해도 결과가 같은 가치중립적인 과정이다.

여기서 오해가 생긴다. 매단계가 가치중립적이기 때문에 연구 전체가 가치중립적이라고 믿는 오해다.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같은 ‘3×7=21’이라도 수력발전소의 발전량 계산일 수도, 원자폭탄의 낙하궤적에 대한 계산일 수도 있다. 계산과정이 가치중립적이라도 계산의 맥락은 가치판단을 담고 있을 때가 많다. 쓰기 위해 아는 것은 아니지만 앎의 쓰임에 눈감는 것은 무책임한 일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92호(2019년 5월14~20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김범준 성균관대 교수 merry@mt.co.kr  |  facebook

안녕하세요. 머니S 산업2팀 김노향 기자입니다. 부동산·건설과 관련한 많은 제보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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