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 다름과 차이, ‘구별과 차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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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한국 물리학회에서 ‘여성 통계물리학자 세션’이 열렸다.

왜 남성 통계물리학자 세션은 없을까. 강연을 준비하다 떠오른 질문이다. 남한산을 둘러싼 산성이 남한산성이고 마을 안의 학교를 둘러싼 담을 학교 담이라 한다. 면적이 작은 쪽이 경계의 이름이다.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남성 통계물리학자 세션이 없는 이유는 자명했다. 여성 통계물리학자가 소수이기 때문이다.

성소수자 평등을 위한 서울 퀴어축제가 열렸다. 축제의 상징은 무지개다. 흑과 백의 두 색깔로 세상을 양분하는 구별, 그리고 그 구별이 만들어낸 차별에 반대하는 소중한 의미가 담겨 있다.

태양빛이 만든 현실의 무지개를 자세히 보라. 무지개에는 ‘일곱 빛깔’이 없다. 무수히 많은 색의 경계 없는 연속이 무지개다. 찬란하게 늘어선 연속 스펙트럼에서는 무엇도 동일하지 않다. 직선 위에 임의의 두 점을 찍었을 때 이것이 정확히 같은 위치에 놓일 확률은 ‘0’이다. 세상에 같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성평등을 양성평등으로 국한하는 사람은 무지개에서 흑백의 두 색만 보는 셈이다.

“우리는 서로 달라”라고 할 때 우열은 없다. 그냥 다를 뿐이다. ‘다름’은 값으로 잴 수 없는 어떤 것일 때가 많다. ‘다름’이 숫자가 되면 ‘차이’가 된다. 성적 차이, 재산 차이, 몸속 성호르몬의 농도 차이…. 차이가 된 다름은 이미 폭력이다. 하나하나 소중한 다차원 연속체의 사람을 일차원 숫자 하나로 환원한다. 차이의 측정은 사람을 한줄로 늘어세울 근거가 되고 ‘차이’의 발견은 ‘구별’의 근거가 된다.

얼마나 차이나는지를 재고나면 그 다음에는 전체를 댕강 둘로 나눠 왼쪽과 오른쪽으로 구별할 수 있다. 구별이 만든 벽이 높아져 한쪽이 게토로 고립되면 구별은 차별이 된다. 차이와 구별로 이어진 다름은 결국 차별이 돼버린다. 다름은 환영할 만한 다양성의 근원이지만 차별은 사회에 해악을 끼친다. 차별의 대상이 되는 사람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힌다.

구별로 차별을 만들어낸 분리의 벽은 묘한 특성이 있다. 밖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다. 게토 밖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게토의 안에서 밖을 향해 시선을 돌릴 때만 높이 솟은 차별의 벽을 뚜렷이 볼 수 있다.

유리 천장은 건물 밖에서도 천장 위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유리 천장에 갇힌 사람의 눈에만 보인다. 불평등으로 인한 상처를 겪어 보지 않았다고 세상이 평등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지금 발 디딘 곳이 세상의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이 여전히 불평등하다고 외치는 사람과 세상은 이제 평등하다고 외치는 사람이 있다면 누구의 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 지는 명확하다. 모든 소수자의 평등을 향한 발걸음에 지지를 보낸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96호(2019년 6월11~17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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