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향기나는 항구'에 푹 빠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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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개의 얼굴을 가진 홍콩
쇼핑의 고수는 모르는 생얼의 '몽콕 로컬여행'


홍콩 하버시티 인근에서 바라본 빅토리아 하버. /사진=양소희 여행작가
맛있는 음식만 골라 먹어도 1년이 부족한 미식천국이 홍콩이다. 과거의 홍콩은 도시 전체가 면세지역이라 쇼핑으로 관심을 끌었지만 지금은 예술 허브도시로 각광받아 세계적인 미술품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찾는다. 날마다 변신하는 홍콩의 맨얼굴은 어디를 가면 볼 수 있을까. ‘내가 홍콩에 왔구나’를 실감하게 하는 장소는 어디일까. 홍콩여행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로컬여행을 시작해 보자.

홍콩을 잘 안다는 사람을 믿지 않는다. 홍콩으로 출장을 자주 가고 쇼핑의 고수라는 사람일수록 홍콩이라는 도시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홍콩은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매력을 가진 도시다. 아찔하게 높은 빌딩 숲속에 아시아와 유럽이 깊숙하게 잘 숨어있어 천개의 얼굴을 가졌다. 그래서 홍콩을 떠올리는 장면도 사람마다 모두 다르다.

홍콩의 대나무 비계. 고층빌딩 건축과 보수 과정에 자주 쓰인다. /사진=양소희 여행작가
최첨단을 자랑하는 세련된 도시지만 대나무에 의지해 건물을 짓고 택시는 현금만 받는다. 빅토리아 하버에서 찍은 홍콩의 야경사진들 덕분에 도시 이미지가 강하지만 전체 면적의 70%가 녹지다. 클럽거리에서는 24시간 파티가 열리지만 매우 안전하며 광둥요리와 영국 애프터눈 티가 공존한다.

영화 <블레이드 러너>, <배트맨 비긴즈> 등 미래를 그리는 영화 속 몽환적인 도시풍경은 홍콩을 밑그림으로 하고 있다. 슬로우 모션으로 두 남녀가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던 <화양연화>의 뒷골목을 걸으며 왕정문이 흠모하는 양조위의 아파트를 몰래 엿보던 <중경상림>의 에스컬레이터에 올라 비현실적인 영화 속에 빠져드는 여행지가 홍콩이다.

◆로컬이 사랑하는 몽콕

활기찬 몽콕의 밤 풍경. /사진=양소희 여행작가
홍콩여행에서 센트럴, 완차이, 침사추이, 코즈웨이 베이만 다녀왔다면 이제 홍콩 로컬문화의 중심지인 몽콕(旺角)으로 가보자. 이곳은 세계적으로 인구밀도가 높은 지역이다. 지하철, 2층버스, 소형버스, 자가용이 바쁘게 사람들을 실어 나르지만 그나마도 부족한지 길 위에도 항상 인파가 넘쳐난다.

몽콕이라는 지명은 이 지역의 역사를 그대로 담았다. '왕각'(旺角)을 중국어 발음으로 하면 왕자오다. 그런데 왜 몽콕이라고 부를까. 원래 지명은 광둥어로 '몽곡'(芒角)이었는데 이민자들이 '몽'(芒)을 '몽'(望)으로 발음했다. 홍콩이 영국에 할양되고 나서 'MongKok'으로 표기했고 1930년 홍콩정부는 '旺角'으로 개명했는데 영어표기 지명인 'MongKok'은 그대로 두면서 몽콕으로 부르게 됐다.

현지인에게 친숙한 몽콕의 옷가게. 여행객들이 가볍게 지갑을 연다. /사진=양소희 여행작가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자랑하는 몽콕은 홍콩 현지인들의 취향에 맞춰진 지역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사고 팔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세몰, 빈티지숍, 템플스트리트, 주방용품, 웨딩드레스, 최신 패션 아이템과 액세서리, 금붕어와 꽃 그리고 과일을 파는 시장들이 모호한 경계로 펼쳐져 있다. 홍콩에서 유명한 레이디스마켓, 스니커즈스트리트, 랭함플레이스도 이곳에 있다.

거리를 다니다가 들어간 빈티지숍에는 저런 물건들을 누가 살까 싶은 잡동사니가 널렸다. 하지만 그 속에서 흥미로운 옛 물건을 찾아내 계산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허름해 보이는 길거리 작은 음식점에서 먹은 국수가 미슐랭 추천 리스트에 소개된 음식이라니. 길에서 찾은 홍콩의 맛이 몽콕을 시크릿한 여행지로 만들어 준다. 무엇을 상상하든 예상이 빗나가는 곳이 바로 홍콩이다.

◆오래된 한약방 뢰생춘

홍콩 현지인이 사랑하는 몽콕의 거리풍경. /사진=양소희 여행작가
몽콕을 다니다보면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고즈넉한 건물이 있다. 뢰생춘(雷生春)이라는 이름의 건물로 광동에서 홍콩으로 이주한 루이룽씨가 운영하던 오래된 한약방이다. 뢰생춘이란 천둥이 봄을 가져온다는 뜻으로 봄이 새로운 에너지를 가져다 줄 때를 말하는데 건강이 돌아오는 회춘을 비유한다. 당시에 루이룽이 판매하는 약은 좋은 평판을 얻었다.

뢰생춘은 베란다 스타일이 가미된 '통라우'(唐樓)라 불리는 주상복합건물로 영국 출신 건축가가 설계해 1931년에 완공됐다. 동서양 문화가 어우러진 홍콩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2000년에 1급 역사적 건축물로 지정됐다. 이 건물이 1444개의 홍콩 유적 건물 중 58번째 1급 역사적 건축물로 지정되자 루이 가문은 사회에 기여한다는 비전에서 정부에 기증했다. 2008년 홍콩침례대학교가 정부의 지원을 받아 원형을 그대로 복원하면서 베란다의 유리창, 건물 밖으로 낸 계단, 내부 엘리베이터 세가지만 추가했다.

뢰생춘의 한방차 재료. /사진=양소희 여행작가
현재 뢰생춘은 지역 주민들에게 접골, 침술, 중국 전통 한방차를 포함한 저렴한 중국 의료를 제공하며 의대생을 위한 현장 훈련과 지역 의사들의 지속적인 교육을 제공한다. 1층은 항상 개방되며 한방차를 판매하는 상점이 있다. 미리 등록을 하면 다른 층에 대한 무료 가이드 투어가 가능하다. 홍콩의 오래된 역사를 가진 건물을 통해 있는 그대로의 홍콩인들의 삶을 엿보는 시간이 된다. 옥상에는 중국 허브차 정원이 있다. 뢰생춘은 홍콩에서 새롭게 뜨는 여행지로 이 건물의 복제된 모습이 영화 <닥터 스트레인지>에 나오기도 했다.

◆감옥에서 술 한잔, 타이퀀

타이퀀 전경. /사진=양소희 여행작가
19세기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 유적지에 2018년 타이퀀(大館) 문화예술센터가 문을 열었다. 유럽의 어디쯤에 온 듯한 인상을 주는 이곳은 영국 식민지 통치하에 지어진 경찰서, 법원, 교도소 건물이다. 홍콩의 중심부 센트럴에 위치해 재개발 논리에 의해 지워져 버렸을 지도 모를 홍콩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문화예술센터의 이름인 타이퀀은 중국어로 '큰집'을 의미한다. 우리나라에서 교도소를 '큰집'이라 부르는 것처럼 홍콩에서도 일반인들은 정식 명칭 대신 큰집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대중이 입으로만 사용하던 말을 정식 이름으로 채택한 점이 흥미롭다.

타이퀀 문화예술센터는 최근 홍콩 현지인들에게 핫플레이스로 사랑받고 있다. 16개의 건물이 복원됐고 이곳의 역사에 감명을 받은 새로운 건물 2개가 들어섰다. 타이퀀라는 말 그대로 대규모의 공간에서 인터랙티브 투어, 유산 스토리텔링,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 주제별 전시 등을 통해 독특한 홍콩의 역사를 만날 수 있다. 연극, 음악, 춤, 영화와 같은 문화 활동이 열리고 있는 것.

타이퀀의 설치미술. /사진=양소희 여행작가
타이퀀의 설치미술. /사진=양소희 여행작가
건물 곳곳에는 관람객들을 위해 가벼운 차와 훌륭한 식사가 가능한 레스토랑들이 있어 만남의 공간으로도 환영받고 있다. 특히 현대미술 섹션인 JC 컨템포러리 건물은 꼭 들려 봐야할 곳으로 타원형 무늬의 독특한 외관과 건물 내부의 회오리 계단이 유명하다. 국제미술 허브로서의 홍콩의 위치를 확인시켜 주는 전시공간에서는 아시아의 앤디워홀이라 불리는 무라카미 다카시의 전시를 볼 수 있다.

경찰서 건물이었던 타이퀀101은 당시에 사용됐던 물건들을 흥미진진하게 전시하고 있는데 관람객은 죄인이 돼 동선을 따라 미션을 완성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타이퀀 문화예술센터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교도소 내부 건물이다. 죄인이 수감됐던 감방은 네온사인으로 장식돼 술 한잔 마시며 쉬어가는 바(BAR)로 운영되고 있다. 아마도 감옥에 갇힌 사람들은 술 한잔이 가장 그리웠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 꿈을 실현해 준 것은 아닐까.

◆세계문화유산이 된 메이호하우스

메이호하우스. /사진=양소희 여행작가
메이호하우스 내부. /사진=양소희 여행작가
1953년 12월25일 섹킵메이(石硤尾) 지역의 화재로 거의 5만8000명의 홍콩 사람이 집을 잃었다. 메이호하우스(美荷樓)는 화재현장에 지어진 홍콩의 첫번째 공공주택으로 1954년에 완공됐다. 총 29개의 콘크리트 블록은 6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재개발돼 철거됐지만 메이호하우스는 유일하게 남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메이호하우스에는 첫번째 공공주택을 그대로 보존해서 당시의 생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박물관이 있다. 1950~1970년대 홍콩의 생활환경과 문화 그리고 생활습관을 실감나게 살펴볼 수 있도록 그 시대의 물건들을 그대로 보여준다. 가족은 많았으며 좁고 힘들었을 삶의 공간이 지금은 인형의 집처럼 전시돼 옛이야기를 들려준다. 홍콩의 역사, 건축, 문화, 사회를 이해하는 데 이만큼 좋은 장소는 없을 것 같다. 우리나라의 옛 모습과도 많이 닮은 사진 속 풍경들을 보면서 홍콩이 친근하게 다가왔다.

박물관과 함께 빈티지숍과 쉬어가는 공간으로 카페가 있으며 나머지 공간은 여행자들을 위한 유스호스텔로 운영된다. 이 호스텔은 홍콩의 첫번째 공공주택의 생활환경을 상세히 설명하는 투어를 갖춘 매우 특별한 숙소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601호(2019년 7월16~22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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