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경제보복 진단, "위기다" vs "기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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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정부가 지난 7일 한국을 수출국가 우대국(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하는 내용의 ‘수출무역관리령 개정안’을 공포하며 ‘경제보복’에 불을 지폈다. 해당 개정안은 공포한 날로부터 21일 후 적용돼 오는 28일부터 정식 시행된다.

관련 수출규제로 한국에 대한 수출이 전면 금지되는 것은 아니다. 일본 현지기업들이 한국에 수출을 할 때 들여다보는 심사기준이 강화되고 이를 통해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뿐이다. 일각에서는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배제한 것에 대해 ‘우대국 혜택’만 제외된 것일 뿐 실질적인 영향은 없을 것이라고 분석한다.

표면적으로는 그럴듯한 논리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됐지만 ‘자율준수무역거래자’(CP) 제도를 활용하면 안정적인 일본산 제품 수입이 가능하다. 비백색국가에 포함돼도 CP 기업일 경우 전략물자 관리능력을 인정받아 개별허가가 아닌 ‘특별일반포괄허가’를 허용받을 수 있다. 3년에 한번 허가를 받아 수출이 가능하기 때문에 이전과 사실상 동일한 효력을 지닌다.


서울 종로구 옛 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뒤로 일본 정부의 한국 화이트리스트 배제를 규탄하는 포스터가 붙어있다. /사진=뉴스1 이승배 기자

그러나 이번 조치를 단순히 우대국 혜택 상실로만 볼 수 없는 것은 그 이면에 숨겨진 배경 때문이다. 지난해 10월30일 우리나라 대법원은 ‘신일본제철’(옛 신일철주금) 등 일본 전범기업이 강제동원된 피해자들에게 손해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전원합의체 판결을 내렸다. 이후 한일 양국 간 관계는 급속도로 냉각됐고 약 8개월 후인 지난 6월부터 한국에 대한 우방국 혜택 철회 소식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베 신조 일본총리는 강제징용과 한국에 대한 우방국 혜택 철회가 연관성이 없다는 입장을 피력했지만 관련 규제를 점차 구체화하면서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지난달 초 일본기자클럽이 주최한 ‘당수공개토론회’에서 아베 신조는 “1965년 한일협정으로 양국은 서로 청구권을 포기했고 이것은 국가 간 약속인데 지켜지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나”라며 “2015년 있었던 (한·일 위안부합의) 정상과 외교장관 사이의 합의를 유엔과 당시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높이 평가했는데 이것도 지켜지지 않은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본정부의 화이트리스트 제외 조치를 정치적 논리에 의한 경제보복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재팬리스크’에 수출환경 급변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되면 어떤 일들이 발생할까. 일본은 무기 개발 등에 사용될 수 있는 물자, 기술, 소프트웨어 등 전략물자를 수출할 때 관련절차를 간소하게 처리하도록 지정한 물품 목록을 만들어 관리한다. 수출무역관리령을 통해 수출품 중 무기로 전용될 수 있는 품목을 규제하며 이를 ‘리스트’(list) 규제와 ‘캐치올’(catch all) 규제로 구분·운영한다.

리스트 규제는 관련 품목을 리스트로 만들어 심사하는 정책이며 캐치올의 경우 이와 관계없이 모든 물품을 통제하는 규정이다. 화이트리스트 국가는 3년 단위로 수출허가를 받고 1주일 안에 선적이 가능한 만큼 비교적 원만한 환경에서 교역이 가능하다. 그러나 비백색국가는 6개월 단위로 허가를 신청하고 심사도 일본정부의 판단에 따라 최장 90일까지 받는 등 차별대우를 받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6일 삼성전자 천안사업장 내 반도체 패키징 라인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

일본이 백색국가로 지정한 나라는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모두 27개국이었지만 우리나라를 제외하면서 26개 국가로 변경됐다. 특히 한국에 대한 수출절차 간소화 혜택을 폐지하면서 기존 수출 상대국 분류체계도 새롭게 조정했다.

경제산업성 설명에 따르면 기존 화이트리스트를 그룹A로 분류하고 규제품목 수출시 일반포괄허가를 받을 경우 원칙적으로 3년간 개별허가를 면제하는 혜택을 제공한다.

그룹B는 핵물질 관련 핵공급그룹(NSG), 화학·생물학무기 관련 오스트레일리아그룹(AG), 미사일·무인항공기 관련 미사일기술통제체제(MTCR), 일반 무기 및 첨단재료 등 범용품 관련 바세나르 체제(WA) 등 4대 수출통제 체제 가입국이면서 일정 요건을 충족한 국가로 그룹A에서 제외된 나라다.

우리나라는 새로 바뀐 분류체계를 적용해 기존 그룹A에서 그룹B로 강등된 상태다. 비규제 품목에서도 일본정부가 군사적 목적으로 전용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면 개별허가를 받아야 하며 최악의 경우 수출이 불허될 수 있다. 이는 일본정부가 양국 간 교역의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산업계 관계자는 “일본 경제산업성이 수출관리 제도에 대한 국내외 실무자 및 관계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분류체계를 변경했다고 하나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긴 어렵다”며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한 것이 징용배상 판결에 대한 보복성 조치로 비칠 수 있다는 판단 아래 분류체계 조정이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등과 관련해 관계장관 합동 브리핑을 하고 있다. /사진=뉴스1 안은나 기자

◆최대 변수는 ‘불확실성’

화이트리스트 제외로 인해 국내 산업계에서는 ‘불확실성’을 근거로 한 ‘위기론’이 확산됐다.

일본이 개별허가 품목으로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리지스트, 고순도 불화수소 등 3종을 지목할 당시 국내 반도체·디스플레이업계는 큰 혼란을 겪었다. 일본산 수입품 의존도가 높은 상황에서 관련 물자에 대한 규제가 강화될 경우 대체재를 찾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골드만삭스가 발표한 리서치보고서에서도 이런 맥락을 찾아볼 수 있다. ‘한·일 갈등 : 즉각적 리스크는 작지만 앞으로 많은 불확실성’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해도 수출은 크게 줄어들 것 같지 않다”면서도 “다만 일본이 추가 수출규제를 내놓는 등 불확실성이 (한국)기업들의 모멘텀에 부정적일 것”이라고 우려했다.

현재 골드만삭스 측은 일본이 한국에 공급망 혼란을 야기할 수 있는 품목으로 화학, 고무·플라스틱, 금속 등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위험과 불확실성은 단기적으로 대체품을 개발하거나 공급망을 다양화하는 것이 불가능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앞으로 몇년 동안 한국에 대한 민간투자에 다소 부담을 줄 수 있다”고 밝혔다.

이런 불확실성과 위기감은 국내 증시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화이트리스트 제외 결정이 알려진 후 국내 증시는 하락세를 이어갔다. 지난 5일 코스피지수는 2년9개월 만에 1940선까지 후퇴했다.

박상현 하이투자증권 애널리스트는 “한국의 전체 전략물자 수입 중 일본이 차지하는 비중은 14.5% 수준으로 높은 편”이라며 “화이트리스트에서 한국이 제외되며 관련 행정규제가 복잡해져 수출통관 일정이 불확실하다는 점이 이번 규제의 변수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이 대한국 전략물자 수출을 엄격히 할 경우 국내 제조업과 경기에 미칠 파장이 클 것”이라고 분석했다.

◆“위기를 기회로” 국산화 시동

화이트리스트 제외로 인해 타격이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 부품소재 중심산업은 현재 공급선 다변화와 국산화를 동시에 추진하고 있다. 제3국에서 소재를 수급해 일본산 의존도를 낮추는 동시에 국산화를 추진해 생산공정에 투입될 수 있도록 체질개선에 돌입하는 전략이다.

현재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가진 반도체 소재 재고분은 두달 반 분량인 것으로 알려졌다. 기업들은 해당 기간 내 일본산 제품 비중을 대폭 낮출 순 없지만 수입처를 늘려 안정적인 환경을 구축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동시에 중소·벤처기업이 생산하는 핵심소재를 사들이거나 자체 개발을 진행하면서 국산화 속도를 높일 계획이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생산 공정에 투입되는 220여가지 일본산 소재와 화학약품을 국내산, 유럽, 미국 등 제3국 생산소재로 모두 교체할 계획이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는 별도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하는 한편 국내외 반도체 소재 생산기업과 접촉해 실공정 투입 여부 및 생산량을 파악하고 있다.

정부도 이런 기조에 발맞춰 ‘기술독립’을 중점에 둔 정책을 통해 기업 지원에 나선다. 해외 소재부품장비 기업 인수합병시 세액공제 혜택 및 해외인력 유치에 따른 소득세 공제 등 각 부처에 흩어져 있던 연구개발(R&D) 지원을 통합해 원천기술 확보에 주력할 계획이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단기적으로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같이 핵심소재에 따라 기술력이 갈리는 산업은 타격을 입을지 모른다”면서도 “여전히 불확실성은 있지만 공급선을 다변화할 2~6개월만 버텨낸다면 국산화 속도를 앞당길 수 있는 재원을 마련해 체질개선이 가능해 질 것으로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어 “일본의 경제보복이 오히려 한국 소재산업의 발전으로 이어질 수 있는 전기를 마련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605호(2019년 8월13~19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채성오 cso86@mt.co.kr  |  facebook

머니S 채성오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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