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58] 트럼프에게 아베는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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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만. /사진=이미지투데이


“만약 다른 나라가 한 체약국 정부를 불공정하고 억압적으로 대한다면 다른 체약국 정부는 이 사실을 통지받자마자 화해적 해결을 이끌어 내고 서로의 우의 감정을 표하기 위해 거중조정할 것이다.”


조선이 미국과 1882년 5월22일에 체결한 조미수호조약 제1조는 조약상대국의 ‘거중조정책임’을 이렇게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시어도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23년 뒤 거중조정책임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이토 히로부미가 총칼로 위협하며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1905년 11월17일)을 체결한 뒤 광무황제는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미국에 알리고 거중조정해 주도록 헐버트 박사를 특사로 파견했다. 하지만 당시 시어도어 대통령은 헐버트를 만나려고도 고종의 친서를 접수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을사늑약 인정한 시어도어 루스벨트


이토 히로부미는 대한제국의 옥새와 외무대신의 직인을 훔쳐 자기들 마음대로 찍었지만 당시 법적 최고주권자인 광무황제의 서명까지 빼앗을 수는 없었다. 프랑스 국제법학자 프랑시스 레이는 1906년 동의의 하자와 일본이 그 전에 체결한 일련의 협정으로 약속한 한국독립 보장의무를 저버렸기 때문에 을사늑약이 원천무효라고 밝혔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법대도 1935년, 1963년 두차례에 걸쳐 국제법을 법전화할 때 ‘강박 아래 체결된 어떤 조약도 무효임’을 재확인하고 무효조약의 대표 사례로 을사늑약을 꼽았다.

 
하지만 시어도어는 조미수호조약의 거중조정책임을 저버린 것도 모자라 명백히 원천무효인 을사늑약마저 승인했다. 시곗바늘을 7개월 전으로 돌려보면 시어도어의 음흉한 속셈이 드러난다. 그는 을사늑약 4개월 전에 미국과 일본 사이에 맺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어둠 속에서 승인했다. 1905년 7월29일, 당시 가쓰라 다로 일본 총리와 윌리엄 태프트 미국 육군장관 사이에 맺어진 이 밀약은 미국의 필리핀 통치에 대해 일본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대신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에서의 지배적 지위를 인정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시어도어는 이런 배신과 아시아 평화파괴에도 불구하고 1907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태프트는 가쓰라와의 밀약으로 필리핀을 식민지로 만든 덕분인지 5년 뒤 시어도어의 뒤를 이어 미국의 27대 대통령이 됐다. 하지만 하늘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자기들 땅따먹기를 위해 다른 나라의 국권과 그 나라 국민의 인권을 무참히 짓밟은 비도덕적·부정의적 행위를 응징했다.


시어도어의 조카인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1933년 32대 대통령이 돼 1945년 4월12일 임기 중 서거할 때까지 12년이나 재임했다. 그는 임기 중에 히틀러가 일으킨 유럽전쟁(2차 세계대전)은 물론 일제가 불 지른 태평양전쟁이라는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미국을 등에 업은 일제는 대한제국을 폭력과 불법으로 강제병합한 뒤 만주를 집어삼키고 중일전쟁을 일으켰고 대만·말레이시아·베트남 등 동남아시아까지 유린했다. 그것도 모자라 1940년 12월7일 미국 하와이에 있는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고 시어도어가 식민지화한 필리핀마저 점령했다.


숙부가 키운 호랑이로 인한 호환을 뼈저리게 겪은 프랭클린도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그는 태평양전쟁이 끝난 뒤 아시아질서를 잡기 위해 장제스 및 처칠과 합의한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이 독립할 것’이라고 약속하면서도 ‘적절한 시기에’라는 단서를 붙였다.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의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였다. 또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소련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하도록 재촉했다. 이는 한반도 분단과 6·25전쟁으로 이어졌고 패전국인 일본이 빠르게 회복하는 계기가 됐다.

◆일본 돕는 트럼프, 진주만을 보라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시간은 기억을 빼앗아간다. 트럼프 미국 행정부는 시어도어와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잘못된 판단의 교훈을 잊었을까. 트럼프 행정부는 일제강점의 피해자인 한국의 중재요청에도 불구하고 가해자인 일본 편을 드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한·미·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겉으로는 중립을 유지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사실상 일본 손을 들어주는 양상이다. 억울한 피해자와 반성할 줄 모르는 가해자 사이에 중립을 지키는 건 가해자 편을 드는 결과를 가져온다. 트럼프 행정부는 미·일 양자회담 때는 한국 대법원의 일제강점기 강제징용 배상판결과 관련해 ‘징용에 대한 문제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으로 모두 해결됐다’는 의견을 보이고 있다고 일본 <마이니치신문>이 보도했다. 마치 114년 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다시 보는 듯하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역사를 똑똑히 바라봐야 한다. 일본은 강한 상대에겐 비굴할 정도로 약한 모습을 보이지만 약한 상대에게는 잔인하게 대한다. 자신이 약할 때는 쓸개를 떼어버리면서까지 강자의 비위를 맞추지만 충분히 강해졌다고 판단할 때는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한국을 강점한 뒤 결국 진주만을 기습한 것이 그렇다. 자기를 낳아준 어미를 먹어버리는 살모사 같다고나 할까.

 
미국은 중국을 포위하기 위해 일본의 재무장을 도우려고 한다.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해 현행 평화헌법을 개정, 태평양전쟁 패전 이전의 천황군국주의로 되돌아가려는 꿈을 키우고 있다. 극우 복고주의를 지향하는 ‘일본회의’가 아베 총리의 군국주의의 꿈을 적극 지원하고 있는 상황은 애써 외면하는 듯하다.


역사는 비슷하게 되풀이된다. 현명한 사람은 역사에서 배워 유사한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 미련한 자는 역사를 애써 무시하고 일을 그르친 뒤 운명을 탓한다. 트럼프 미 행정부는 ‘일본이 이번에는 다를 것’이라는 근거 없는 전제를 벗어던지고 일본을 똑바로 봐야 한다. 숙부의 판단착오로 임기 내내 일본에 시달린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고통을 되풀이하는 건 정말 어리석은 일 아니겠는가.


☞ 본 기사는 <머니S> 제606호(2019년 8월20~26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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