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기의 걷는 자의 기쁨] 가을 길목의 진고개와 소금강

 
 
기사공유
새벽, 숲이 열리다
변화무쌍한 길, 늘 그곳에 있다


백두대간의 첩첩산중.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백두대간에는 진고개가 있다. 강원 평창 병내리와 강릉 연곡면 솔내의 경계에 위치한 1072m의 높은 고개다. 진고개(泥峴)는 비가 오면 온통 진창이 된다는 뜻에서 이름 지어졌다. 지금이야 길이 잘 나 있어 괜찮지만 예전에는 상황이 달랐다. 길이 매우 안 좋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비를 잔뜩 머금은 구름이 고개를 넘지 못하고 품고 왔던 비를 쏟고 나서야 비로소 고개를 넘었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새벽은 숲과 함께 열린다

이번 여정은 노인봉을 경유해 무릉계 소금강 계곡을 따라 걷는 것이다. 동이 채 트지 않은 이른 새벽, 느슨해진 신발끈을 다잡아 묶었다. 막 가을로 접어드는 탓일까. 새벽 찬 공기는 몸을 움츠리게 한다. 구름이 지나는 길목, 하늘의 별은 구름 속에서 언뜻언뜻 얼굴을 내비친다. 바람은 구름을 거세게 흩뜨리며 그 형체를 자꾸 밀어낸다.

진고개 고위평탄면의 새벽길.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마음은 고요하고 경건하다. 모두가 잠든, 아무도 밟지 않은 새벽의 길을 걷는다는 생각에서다. 캄캄한 새벽, 헤드 랜턴으로 길을 밝히며 진고개로 향했다. 새벽의 시간은 참 빠르게 흐른다. 미명(微明)은 여명(黎明)으로 바뀌고 밝아오는 새벽녘 숲이 열리기 시작했다. 고위평탄면의 드넓은 초지에는 야생 들꽃이 무리를 이뤘다. 어둠 속에서는 제 빛을 뽐내지 못했던 나무와 들꽃들이 여명에 다투듯 제 모습을 드러낸다. 옅게 드리운 새벽안개는 나무에 걸려 무수한 전설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노인봉에 오르다

노인봉(老人峰·1338m) 정상에 올랐다. 2시간 남짓 걸려 도착한 정상이다. 길에 펼쳐진 수목사이로 붉디붉은 며느리밥풀꽃과 이름 모를 야생화를 넋 놓고 구경했다. 노인봉은 기묘하게 생긴 화강암 봉우리가 우뚝 솟아있어 멀리서 바라보면 백발노인의 모습과 같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황병산 산허리를 넘는 구름.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정상에서 사방을 둘러보니 첩첩산중이고 망망대해다. 태양은 이미 떠올라 일출의 기쁨을 만끽하진 못했지만 동해바다는 햇빛에 반사돼 은색의 향연을 이룬다. 황병산(1407m)은 눈앞에 있는 듯 가깝다. 서쪽 오대산 겹겹한 연봉에서 바람에 실려온 구름이 운해를 이루며 밀려오다가 노인봉과 황병산 사이의 등허리를 넘실거리며 넘어오고 있다. 멀리 소황병산은 머리를 내민다. 그 뒤로 대관령의 풍차가 어렴풋하게 눈에 들어온다.

북으로 설악을 바라보니 첩첩한 산들이 장관을 이뤄 한동안 눈을 뗄 수 없었다. 바람이 차 겉옷을 꺼내 입었다. 한시간을 더 머물다 정상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낙영폭포.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소금강의 시작, 낙영폭포

노인봉대피소는 남쪽 황병산과 대관령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과 동쪽 소금강 계곡의 갈림길에 있다. 소금강 계곡으로 길을 잡는다. 목적지 소금강 분소까지 약 9㎞가 남았다. 계곡의 시작인 낙영폭포(落影瀑布)까지 급경사의 1.7㎞ 내리막 구간이다.

소금강 가는 길목의 고사목.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율곡 이이의 청학산기(靑鶴山記)는 마치 금강산을 축소해놓은 것 같다고 해 소금강(小金剛)이란 이름을 붙였다. 낙영폭포다. 산에서 내린 천(川)들이 모여들어 물줄기가 커지다가 낙영폭포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소리를 내지르며 물을 쏟아낸다. 폭포에서 떨어지는 작은 물방울들이 흐트러지며 초상(肖像)을 만들어낸다. 그래서 낙영폭포인 모양이다. 쏟아져 내린 물은 속도를 더하여 밑으로 내달렸다. 사문다지와 광폭포, 삼폭포를 지난다.

◆백운대, 그리고 다양한 군상의 ‘만물상’

낙영폭포에서 4㎞를 지나니 넓고 평평한 바위가 마치 하얀 구름모양처럼 겹쳐있다. 백운대(白雲臺)다. 계곡물은 평평하고 넓게 퍼져 흐르며 구름을 덮듯이 백운대 바위를 타고 넘는다. 그 모양이 마치 구름 위를, 또 다른 구름이 타고 넘는 듯하다. 바위가 구름이고 계곡물 또한 구름이다. 소금강의 변화무쌍함을 제대로 절감한다.

만물상.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백운대를 지나면 물도 많아지고 다양한 형태의 계곡이 펼쳐진다. 계곡을 사이에 두고 우뚝 솟은 절벽이 마주한다. 바위의 생김이 기괴하고 다양한 물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 소금강의 만물상(萬物相)이다. 스님의 모양도 있고 원숭이의 모양도 있다. 삼라만상 모든 자연의 이치와 형상이 숨어있다. 바위의 모양은 보는 각도에 따라 다양한 군상을 나타낸다.

◆구룡폭포와 식당암

구룡폭포의 제9폭.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만물상을 지나 구룡폭포(九龍瀑布)에 이른다. 지명은 9개의 크고 작은 폭포가 이어져 9마리의 용이 폭포를 하나씩 차지한다는 데서 유래했다. 직접 볼 수 있는 폭포는 제8폭포와 9폭포로, 소금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낙영폭포에서부터 백운대까지는 인적 없이 소금강을 즐길 수 있다. 백운대를 지나면서 인적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구룡폭포에 이르러서는 인파가 가득하다. 이곳 구룡폭포까지만 들렀다 돌아가는 가벼운 차림의 등산객이 많아서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소금강 분소에서 출발하면 3㎞ 남짓 되는 거리라 접근하기도 편하고 소금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명소이기에 그런 모양이다.

식당암. /사진=박성기 여행 칼럼니스트
구룡폭포를 지나 식당암(食堂岩)에 이르렀다. 식당암은 평평하고 넓어서 많은 등산객들이 행장을 풀고 음식을 나누고 있다. 신라의 마지막 왕자인 마의태자가 군사들을 훈련시키고 식사를 하던 곳이란다. 소금강을 찾은 율곡 이이가 이곳에서 식사를 했다고 전해진다. 많은 사람이 모여앉아 음식을 나눠 먹을 수 있게 넓고 편한 곳이다. 예나 지금이나 식사를 즐기는 너른 마당인 것이다.

진고개에서 이곳까진 14㎞ 여정이다. 짧지 않은 길이었지만 가을로 접어드는 계곡은 피곤함을 잊게한다. 예전 봄에 걸었던 이 길과 가을로 접어드는 지금의 이 길은 사뭇 다르다는 느낌이다. 계절에 따라 같은 길도 다르게 보인다. 가을이 깊이 익어갈 때 붉게 물든 소금강의 단풍과 눈 내린 하얀 소금강을 기다리는 이유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610호(2019년 9월17~23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 0%
  • 0%
  • 코스피 : 2068.11상승 23.509:53 10/14
  • 코스닥 : 639.53상승 6.5809:53 10/14
  • 원달러 : 1184.80하락 409:53 10/14
  • 두바이유 : 60.51상승 1.4109:53 10/14
  • 금 : 60.44상승 2.6709:53 10/14
  • image
  • image
  • image
  • image
  • image

커버스토리

정기구독신청 독자의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