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연의 그래픽저널] 체르노빌 교훈과 'DLF 중간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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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4월26일 새벽 12시. 구소련, 우크라이나 북서부에 위치한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의 주조정실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돈다. 마지막 원자력발전소 안전시험을 시행할 시각이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험은 이후 세계의 운명을 바꾸게 된다. 아마 그곳의 엔지니어들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이때부터 전 세계인이 이 도시 이름을 기억하게 되리란 것을.

체르노빌. 이름의 저주일까. 검은 잎사귀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이 도시는 방사능 낙진에 덮인 잿빛 도시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도시가 인류에게 준 충격은 방사능의 공포만은 아니다.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절대 위험할 수 없다’는 역설적 통념을 깼기 때문이다. 있어서는 안 될 폭발은 원자로의 결함이 주효했다. 또한 당시 현장에서 얽힌 사소할 수 있는 이유들도 기폭제로 작용했다. 먹고 사는 문제로 귀착되는 수많은 경제적인 동기들이 원자로 밖에서 연쇄 핵반응을 일으키며 원자로의 폭발로 이어졌다.


/사진제공=일러스트레이터 조수연 공정한금융투자연구소장

◆편협한 인간에 폭발한 원자로

올 5월 미국 유선방송 HBO는 4K 영상의 다큐멘터리 드라마 <체르노빌>을 방영했다. 이 작품은 일반 재난드라마와는 다르게 자극적 재난 현장보다는 재난 전후 인간의 모습을 냉철하고 잔인하게 묘사하며 시청자가 셰익스피어를 보는 것처럼 그 의미를 곱씹게 한다.

그 의도가 성공한 것인지 몇가지 스토리가 강하게 남았다. 폭발의 원인이 된 원자로 안전시험은 당시 원자로 관리자들의 꼭 필요한 과업이었다. 안전시험을 위해 전력생산량 등 안전 조건을 유지해야 했으나 상부의 전력생산 명령에 원자로 조정실 책임기술자는 불안전한 조건에서 안전시험을 무리하게 강행했다. 진급 욕구로 가득한 그의 사고를 사로잡고 있는 충성심은 이미 원자로가 폭발할 수 없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이후 전력량 유지 시한인 12시에 맞춰 부실한 매뉴얼대로 엔지니어들은 안전시험을 추진했다. 진행과정에서 엔지니어들은 몇 차례 이상 경고를 보고했지만 수석 책임자는 모두 무시하고 ‘해고’ 위협을 하며 진행을 강행한다. 수석책임자가 믿는 것은 최후 위험 시 원자로를 정지시킬 안전 버튼이었다.

결국 급격히 치솟는 원자로의 출력계수에 놀라 안전버튼을 눌렀으나 원자로는 폭발하고 만다. 수석책임자가 놓친 것은 ‘국가도 항상 정직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저렴하게 설계됐던 원자로의 안전버튼은 오히려 방아쇠로 역할을 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는 안전장치를 누를 정도로 원자로가 엉망으로 관리되지 않았을 것이라 믿었던 듯싶다.

결국 편협한 인간의 신념을 기폭제로 체르노빌은 폭발했다. 상당시간 동안 원자로 엔지니어와 정부는 체르노빌 원자로가 폭발했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그 시간에 체르노빌 주민들은 원자력 발전소에서 쏟아지는 불빛을 구경하러 거리로 나온다. 눈처럼 떨어지는 방사능 낙진을 바라보며 주민들은 신기해한다. ‘어떻게 저런 색이 나오지. 아름답다.’

드라마의 주연은 체르노빌 사고의 원인을 기록하고 밝힌 후 자살로 생을 마감한 ‘발레리 레가소프’다. 그러나 필자가 감동을 받은 것은 공산당간부로 사법부와 KGB의 마지막 진실 은폐를 막고 진실을 밝히도록 한 ‘보리스 셰르비나’다. 최고 권력이 될 욕심을 버리고 진정 사람을 사랑한 공무원이 부럽고 우리가 체제적 우월감 속에 조롱하는 공산권 사회임에도 그의 이름이 이렇게 역사에 남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다.

◆금융소비자 배제된 금융의 현주소

독자들은 왜 드라마 타령을 길게 하는 것인지 의아해 할 수도 있겠다. 이젠 쓸 거리가 떨어졌나 실망하는 분도 계실 것이다. 그러나 최근 한 보고서로부터 받은 충격이 이 <체르노빌> 드라마와 사고를 떠올리게 했다. 바로 이달 1일 금융감독원이 내놓은 <주요 해외금리 연계 파생결합상품(DLF) 관련 중간 검사결과>가 그것이다.

이미 수개월간 DLF 관련 불완전판매 이슈를 소재로 언론의 보도가 이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큰 기대를 하지 않고 해당 자료를 확인했다. 생각지도 않게 이번 윤석헌 금융감독원장 체제하에서 발표한 보고서는 은행, 증권, 자산운용사가 금융소비자를 어떻게 보고 대하는가에 대한 놀라운 내용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물론 KEB하나은행과 우리은행이 판매한 DLF의 원금손실과 관련된 검사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금융산업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적시하는 역사적인 자료라고 평가하고 싶다.

30년 가까이 금융현장에 있었고 펀드부터 보험까지 다양한 금융상품 판매 경험이 있는 필자는 금융산업시스템의 많은 문제를 경험했고 개선을 위해 이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그러나 사실 금융산업 또는 금융자본이라는 세계가 일반인들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높은 철옹성 속에 있다. 은퇴한 일개 칼럼리스트인 필자가 금융시스템에 얼마만큼 심각한 문제가 있는지를 증명하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번 보고서에 그 내용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금융에 관심있는 분들은 꼭 봐야할 내용이다.

금융회사에는 경영진과 영업부분 그리고 이를 사전적으로 견제하는 준법감시, 리스크관리, 소비자보호 기능이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기능은 자본시장법과 금융감독원규정, 금융투자협회 자율규정을 준수하며 시행돼야 한다.

금감원의 보고서를 요약한다면 금융소비자 보호를 위해서 이들 기능은 잘 작동하지 않았고 작동됐더라도 무시했으며 회사의 이익을 위해서는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에 가까운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는 것이다.

◆체르노빌 교훈 되새겨 더 큰 재앙 막아야

평생을 금융인으로 살아왔기에 이 보고서를 보며 참담함을 느꼈다. 현직 금융인의 심정은 어떨까 궁금해진다. 부끄러울까. 아니면 재수가 없었다고 느낄까. 먹고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 할까. 최근 어떤 검사가 국정감사 증인석상에서 ‘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지배구조와 법의 운영이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번 금감원 보고서도 금융산업의 법이 아니라 지배구조와 운용이 문제라는 점을 정확히 지적하고 있다.

사실 아무도 금융산업의 문제를 지적하거나 느끼지 않는 상황에서 다소 뚱딴지같은 주장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리고 DLF에만 한정된 것이라고 치부ㅏ며 금융산업은 물론 금융소비자조차도 덮으려할 것이다.

필자는 30년 전 금융산업에 입문할 당시에는 ‘고객과 함께 커야 한다’고 배웠고 나름 금융인이라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러나 은퇴할 즈음에는 ‘금융회사 수익의 원천으로 고객’이 강조되고 ‘발생되는 수익의 양’이 고객이나 직원 평가의 잣대가 돼 있었다. 그런 변화 속에 필자는 금융인으로 많은 갈등을 느꼈다.

후배들의 갈등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금융을 직업으로 가진 사람을 카드, 펀드, 대출 때문에 징징대는 극한 직업인이라는 평가가 자주 들린다. 어쩌면 온라인, 모바일의 금융거래 비중이 급속히 커지는 것에는 금융산업의 금융소비자 경시 풍조가 상승작용을 일으킨 것이 아닐까.

이번 보고서에 금융회사의 민낯이 너무 자세히 지적돼 있기에 자세히 내용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다. 체르노빌의 교훈을 되새겼으면 좋겠다. DLF 사태는 언제든지 더 큰 금융재앙이 발생할 수 있다는 사전 경고다. 금융산업에 몸담은 사람들은 꼭 자성하고 개선하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또 ‘보리스 셰르비나’의 용기 있는 행동처럼 이번 금감원 DLF보고서가 우리나라 금융이 국민을 위한 금융으로 재탄생시키는 시발점이 되길 바란다.


/사진제공=일러스트레이터 조수연 공정한금융투자연구소장

☞ 본 기사는 <머니S> 제614호(2019년 10월15~21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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