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66] 복귀한 침묵하던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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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미지투데이

그것은 계시처럼 한조국(韓朝國)에게 찾아왔다. 삼칠일 전쯤 벗 강조국(江祖國)에게서 10월 둘째 토·일요일 남덕유산에 가는데 함께하자는 권유를 받았다.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원래 그날은 한조국이 사춘기 시절을 함께 보낸 까까머리 고향동무들과 1년에 2번 봄가을에 만나는 날 중 하루였다. 응당 그곳에 가야 했다. 하지만 어떤 알 수 없는 힘이 그를 남덕유산으로 이끌었다.

꿈결에 문득 버스가 멈췄다. 새벽 3시였다. 보름달이 보초서는 하늘엔 오리온자리 삼태성과 북두칠성 카시오페아 등이 어울려 반짝거렸다. 마치 한조국 일행이 오길 오랫동안 기다렸음을 드러내며 환영의식을 시작하는 모습이었다. 가을 잠을 늘어지게 자던 개도 컹컹 추임새를 넣었다.

◆민심은 우주만물과 통한다

나날이 싸늘해지면서 갈수록 약해지는 풀벌레 노래를 뒷받침하려는 듯했다. 밤에 자동차가 전조등을 높게 비추며 지나가도 소 닭 보듯 무관심했으나 이날 새벽엔 버스에서 내린 일행이 팔각정에서 산행을 위한 에너지 비축행사를 푸짐하게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곡 물소리도 달랐다. 한여름 소나기로 불어난 물처럼 울림이 컸다. 며칠 전 하늘 열린 날에 찾아왔던 불청객, 미탁이 뿌려놓은 흔적이었을 것이라 가늠됐다. 그럼에도 색다름은 완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황강의 첫 물줄기가 되는 삿갓골샘 물이 흘러내리는 첫 마을 황점마을에서 이날 산행이 시작됐기 때문이었으리라.

기운은 물로만 오지 않는다. 기운은 땅속으로 보이지 않게 흐르지만 성글어지기 시작한 나뭇잎 사이로 보름달과 별들이 응원을 보냈다. 그 부추김에 힘입어 이마와 등줄기에 흐르는 땀은 잠시 멎었고 무릎까지 차오른 거친 숨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목 줄기를 시원하게 타고 내려 세파에 찌들었던 머리를 시원하게 주물러 준 삿갓골샘의 살아있는 물은 하늘과 땅의 얼과 넋을 모두 담은 기운 덩어리였다.

기운은 하늘에서 뻗치는 생명으로도 온다. 두 눈, 두 귀, 한 가슴이 뚜렷하게 볼 수 있게 색으로 온다. 두 다리 힘 모두 뺏는 시험으로 마음에 낀 때 말끔히 씻어낸 깨끗함으로 온다. 가야산 쪽에서 빛나던 별들이 안녕이라고 손을 흔들며 더 반짝반짝거리더니 살그머니 사라졌다. 이내 푸르스름하게 바뀐 하늘은 시나브로 누나 볼연지처럼 발갛게 물들었다. 지긋한 불덩이 동살 물리치고 햇귀 떠나보내며 조금씩 조금씩 성큼성큼 동쪽 하늘을 수놓았다.

◆때를 알았거든 실행에 옮겨야

눈멀고 얼을 빼앗겼을까. 멍청이처럼 굳어 서 있을 때 따듯한 손길이 어깨를 맛나게 두드린다. 밤새 고생했다며, 찬바람 채찍 떨면서 잘 견뎌냈다며 이제 어려움은 가고 님이 다시 돌아왔다고 살며시 알려준다. 그 뿌듯함에 침묵하던 님이 복귀했음을 뚜렷하게 보았다.

님이 돌아왔읍니다
님이 침묵하던 시대는 가고 님이 사랑하는 시대가 왔읍니다
번득이는 총칼에 가슴 떨며 소곤소곤 목소리 죽이던 시대는 이미 멀리 떠났읍니다
침묵이 저항이던 때가 지나고 말과 행동이 사랑인 님의 시대가 왔읍니다
먹구름 틈 뚫고, 해돋이 빛살 타고, 신 새벽 길 달려, 뜨거운 눈물 닦아주며 귀환했읍니다
님이 돌아왔는데 고통스런 삶에 아프지 않으면 거짓입니다
님이 돌아왔는데 미워할 것에 미워하지 않으면 허위입니다
님이 돌아왔는데 나설 곳에서 행동하지 않는 것은 나약이고 비겁입니다
님이 돌아왔는데 빌붙어 사는 것은 겨레에, 나라에, 하늘에, 큰 죄입니다
님이 돌아왔으니 떨치고 일어나 몸으로 말하고 말로 행동해야 합니다
님이 돌아왔으니 침묵이 금이라는 짓눌린 뇌의 지배 뚫고 벗어나야지요
향기바람 불고, 뜨뜻 살림 피고, 알음사랑 펼쳐지게 말입니다
겨레에, 나라에, 하늘에, 죄지음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그 후손이든, 용서받지 못합니다
오늘도 서늘한 소리 결이 가슴 옷깃을 두드리며 파고듭니다
님의 그 소리 결에 깜짝 놀라 눈 뜨고 귀 열리고 가슴 뜨거워집니다

◆지도자는 겸손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

그 뿌듯함. 오늘에 앞서 수없이 많이 보고 느꼈던 동살 햇귀 돋을볕과 다른 해돋이였다. 한조국은 그 따사로운 뿌듯함을 가득 안고 봉황봉으로 가는 발길에게 자꾸 물었다. 왜 오늘 해돋이는 그토록 달랐을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은 봉황봉에 올랐을 때 눈으로 풀렸다.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보아도 확 트인 모습 지리산·가야산·대둔산·마이산이 에워싸고 있는 분지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봉황봉 모습이 답이었다. 바로 겸손하라는 게 가르침이었을 것이다. 어려움에 처한 나라 바로잡고 갈수록 힘들어하는 국민들의 살림살이에 웃음꽃 피게 하려면 봉황봉을 닮으라는 것. 커다란 뫼가 스스로 땅 아래로 내려가는 겸손을 실천하라는 것을 느낌으로 받아들였다.

한조국의 그런 의심은 봉황봉을 내려와 서쪽에 있는 봉우리, 즉 서봉에 올라 봉황봉과 향적봉(香積峰)을 바라보면서 스스로 풀렸다. 서봉 높이는 1492m, 봉황봉은 1507m, 향적봉은 1614m다. 한조국은 깜짝 놀랐다. 정말 우연의 일치일까. 14, 15, 16은 ‘주역’의 대유(大有), 겸(謙), 예(豫) 괘다. 대유는 하늘 위에 떠 있는 해를 상징하는 괘로 모든 것을 다 갖고 있는 존귀함을 비유한다. 겸은 큰 산이 땅 아래 있는 모습으로 벼가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것처럼 겸손함을 뜻한다. 예는 우레가 땅 위에 있는 상으로 건국 초기에 유능하고 현명한 사람을 등용해 새로운 역사를 만든다는 것을 비유한다.

공자는 대유, 겸, 예 괘에 대해 다음처럼 한 줄로 요약하고 있다. 악한 것을 막고 선한 것을 드날려서 하늘의 아름다운 명을 따른다(대유). 많은 것을 덜어 적은 것을 더하고 물건을 저울질하여 고르게 베푼다(겸). 음악을 짓고 덕을 숭상해 성대히 상제께 천신(薦新, 햇곡식을 맨 먼저 올리는 것) 드리듯 조상께 제사지낸다(예). 한마디로 하늘의 뜻 즉, 민심에 따라 국민들을 위하는 위민정치를 정성껏 해야 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겸은 덕(德)의 자루 즉, 손잡이로서 높되 빛나서 예(禮)를 짓는다고 했다. 예란 오늘날의 예의범절뿐만 아니라 예의범절을 통한 품위 있는 정치 즉, 예치(禮治)를 가리킨다. 그 중심에 겸손한 임금인 겸이 자리하고 있다. 덕유산 이름이 덕유(德裕)인 이유가 바로 겸 즉, 덕의 자루이기 때문이다. 시월의 멋진 둘째 주말 남덕유산에서 덕치의 싹틈을 보았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615호(2019년 10월22~28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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