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 71-끝] 강온문무 겸비해 결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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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미지투데이

‘일도 이빽 삼모.’

30여년 전 사회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 ‘사회 선배’에게서 들은 말이다. 무슨 뜻이냐고 묻자 ‘첫째, 도망간다, 둘째, 모든 빽을 동원한다, 셋째, 첫째와 둘째가 통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경찰이나 검찰에 가면 모른다고 발뺌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살다 보면 의도했거나 하지 않았거나 뜻하지 않게 잘못을 저지르게 마련인데 ‘일도 이빽 삼모’를 알아두면 좋을 것’이라는 충고도 뒤따랐다.

며칠 지나지 않아 또 한 ‘지혜’를 배웠다. 검찰에서 오라고 할 때 ‘스테이터스’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스테이터스(Status)란 자격, 신분, 지위 등을 뜻하는 말로 검찰이 부를 때의 신분 즉 피의자, 참고인, 고발인, 피고발인 등등의 신분을 잘 구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시간이 많이 흘러 군사독재가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정착돼 가고 있다. 하지만 ‘일도 이빽 삼모’는 여전히 삶의 지혜라는 탈을 쓴 적폐로 자리잡고 있다. 보통사람들의 모범이 돼야 할 청와대 수석, 장관, 국회의원들은 이를 적극 활용한다. 돈 없고 빽 없는 서민들은 그림의 떡이다. 삶의 지혜는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층만을 위한 것일까.

◆자연 이치 그대로 품은 쇠비름

신랑님이 오신다
색시님도 오신다
신랑 방에 불 켜고
색시 방에 불 켜라…

지금은 가사와 음이 가물가물한 코흘리개 시절 농촌에서 보낼 때 불렀던 노래다. 쇠비름 뿌리를 훑으며 이 노래를 불렀다. 노래의 정성 덕분일까, 신랑·색시의 부끄럼 때문일까. 그렇게 몇번 훑으면 하얀 뿌리가 빨갛게 바뀌었다. 장난감이 없던 그때 보릿고개를 힘겹게 넘으며 배고픔을 달랬다. 가끔 우물로 달려가 물 한바가지 벌컥벌컥 마시며….

쇠비름은 낮은 산이나 들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잡풀이다. 햇볕 잘 드는 곳이나 반 그늘진 곳에서 자란다. 밭을 갈고 콩이나 보리씨를 뿌려놓으면 먼저 싹트는 게 바로 쇠비름이었다. 처음 싹틀 때는 뿌리가 약해 잘 뽑히지만 시간이 흐르면 뿌리가 단단해져 잘 뽑히지 않는다. 일손이 부족했던 시절 아이들에게 재밌는 놀이라고 하면서 쇠비름을 뽑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쇠비름은 오행초(五行草)라고도 불린다. 다섯가지 색을 갖고 있어 수화목금토의 오행을 갖춘 풀이라는 뜻이다. 실제로 쇠비름 줄기는 붉다(火). 잎은 초록색(木)이고 뿌리는 하얗다(金). 꽃은 앙증맞게 노랗고(土) 열매는 까맣다(水). 뿌리, 잎, 줄기, 꽃, 열매의 색이 이처럼 다양한 것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쇠비름은 폭염에 말라비틀어져도 죽지 않고 비가 오면 다시 살아나는 끈질긴 생명력도 갖고 있다. 오메가3라는 필수지방산이 많다는 사실이 알려진 뒤부터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주역에 등장하는 쇠비름, ‘중도 실천하는 군자’

그래서일까. 쇠비름은 동양 최고의 철학이자 제왕학이라 불리는 ‘주역’에 등장한다. 결단하는 것을 뜻하는 택천쾌(澤天夬)괘의 구오(九五) 효사다. “현륙쾌쾌 중행무구"(莧陸夬夬 中行无咎, 현륙을 결단하고 결단하면 중을 행함에 허물이 없다)가 그것이다. 여기서 현륙이 바로 쇠비름이다.

쾌괘는 양이 자라고 자라 하나 남은 음을 몰아내는 결단을 내리는 상이다. 계절로는 4월(음력 3월, 辰月: 진월)로 농사일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때다. 이때를 놓쳐 씨를 뿌리지 못하면 한 해 농사를 망친다. 우물쭈물하지 말고 해야 할 일을 과감하게 결정해서 시행해야 잘못이 없다. 게다가 구오(밑에서부터 다섯번째 양효)는 결단을 내리는 주체다.

쇠비름은 결단을 내리는 군자의 자세를 상징한다. 의사결정자는 무턱대고 강경책을 쓰거나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유약함에서 벗어나 강경함과 온건함, 문과 무를 고루 갖춰 균형 있는 중도를 유지해야 한다. 오행초라 불리는 쇠비름처럼 어짊(仁), 옳음(義), 사양(禮), 지혜(知), 믿음(信)의 다섯 가지 덕을 고루 갖추고 백성을 위하는 덕치를 시행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다.

공자는 '중행무구'를 “중(中)이 아직 빛나지 않는다"(中未光也)라고 해석했다. 미(未)는 미혼, 미취학아동처럼 지금은 아니지만 앞으로 이뤄질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뜻한다. 불(不)이 아닌 것으로 확정된 것과 반대다. 미혼이란 말은 있어도 불혼이란 말이 없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공자가 “중미광야”로 주석한 것은 중도가 앞으로는 빛나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100세 시대 준비하는 쇠비름의 지혜

11월(음력 10월)은 온 누리에 음기가 가득 차는 해월(亥月)이다. 나뭇잎이 단풍비가 돼 모두 떨어지고 줄기 끝까지 올라갔던 물은 땅속으로 빠진다. 곤충과 개구리와 곰은 땅속으로 들어가 겨울잠을 자며 봄을 기다린다. 사람도 새로운 일을 시작하기보다 봄부터 해 온 일을 매듭짓고 다음 봄에 할 일을 생각하고 준비하는 시기다.

한국은 1960~1990년대에 세계를 깜짝 놀라게 했던 압축성장보다 더 빠르게 노령화하고 있다. 노인비율이 높아지면서 복지예산이 증가하고 있지만 저출산과 저성장 등으로 복지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재원확보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현재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리스크(위험)는 100세까지 살지 모른다는 것’이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고 있다. 80세 전후까지 살 것으로 은퇴설계를 했는데 그 이후까지 살면 대책이 없다는 우려 때문이다.

노인들은 불안이 커지고 있는 반면 20대 젊은이들은 불만이 쌓여 가는 양상이다. 20대는 일자리 잡기와 내집 마련이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워 결혼하기도 힘들다. 그런데도 그들이 져야 하는 사회적 부담은 무거워지고 있다. 20대가 빠르게 ‘보수화’하고 있는 현상은 이런 불만을 반영한 것이다. 여기에 ‘일도 이빽 삼모’의 처세술은 젊은이들을 좌절하게 만든다.

칡넝쿨과 등나무 줄기처럼 꼬여 있는 갈등을 풀어내기가 쉽지 않다. 지금 한국은 쇠비름처럼 오덕을 겸비한 지도자가 절실하다. 갈등은 풀지 않으면 싸움으로 비화된다. 처음에는 감정과 이론 싸움이지만 쌓이고 쌓이면 폭력 싸움으로까지 악화된다. 그 싸움에서 이득을 볼 수 있다는 근시안적 사고에 매달리면 결국 모두 무너지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현륙쾌쾌 중행무구’의 강온문무를 겸비한 사람들이 많아지는 황금돼지해 겨울이 되길 바라본다.

※ 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을 71회를 끝으로 마무리합니다. 그동안 애독해주신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621호(2019년 12월3~9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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