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고의 미인, 결혼의 고수가 전하는 말

이건희의 행복투자

 
  • 머니S 이건희|조회수 : 6,934|입력 : 2011.10.14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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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역사상 최고의 미인으로서 양귀비, 클레오파트라 등이 꼽힌다. 그러나 너무 옛날 사람들이라서 요즘 사람들이 실제로 직접 본 적은 없고 기록에 의해 그렇게 알고 있을 뿐이다. 요즘 시대 사람들도 직접 본 20세기의 여성 중에서는 세계 최고 미인으로서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흔히 꼽힌다. 1932년 2월27일 영국에서 태어난 영화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세기의 연인이 되었고 올해 3월23일에 사망했다. 미모에 걸맞게 결혼을 여러 차례 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한국에서는 1940년에 태어나서 1960년대 최고의 여배우로 날리던 김지미가 '동양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고 불릴 정도로 최고의 미인으로 꼽혔었다. 동남아지역에서도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하는 미인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요즘처럼 미인 배우가 많이 나오는 시절이 오기 전까지는 한국에서 오랜 세월 동안 미의 대명사로 여겨졌다. 촬영감독들은 카메라 뷰파인더를 통해 볼 때 어느 각도에서도 화면을 사로잡아 연애하고 싶은 감정에 빠져들 정도였다고 하며, 화장을 안 한 맨얼굴은 더 깨끗하고 아름다웠다고 하니 미인 중 진정한 미인이었던 셈이다.

◆‘동양의 엘리자베스’ 김지미는 누구
 
사람들이 김지미를 직접 보면 세가지 이유로 놀랐다고 한다. 첫째, 스크린에서보다 더 예뻐서. 둘째, 걸걸한 목소리에. 셋째, 생각보다 키가 작아서(160㎝). 대학교에 촬영가면 남학생들이 둘러싸고 있다가 한명이 뛰어나와 확 껴안고 ‘죄송합니다’ 이러고 가곤 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17살 때 명동에서 캐스팅되었으므로 길거리 캐스팅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김기영 감독이 끈질기게 쫓아다닌 결과 영화계에 <황혼열차>로 데뷔하여 본명 김명자로부터 예명 김지미로 바꿔 불리게 되었다. 김지미는 8남매 중 일곱째로서 집안의 학력이 좋아서 언니·오빠가 서울대에 다니고, 이화여고 다니는 언니도 있었다고 한다.

60~70년대 무려 30편에 겹치기 출연하고 1년에 100여편의 작품에 관계된 적도 있듯이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영화계를 휩쓸었다. 아시아영화제 여우주연상. 파나마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시카고영화제 세계 평화메달상 수상, 대종상 여우주연상 수차례 수상 등 국내외 화려한 수상경력을 지녔다. 86년에는 지미필름을 설립하여 창립작 <티켓>으로 성공하였고 국내에서 여배우 출신으로는 최초로 영화제작자로도 활동한 제작자 1호 여성이다.

92년에 자신의 본명을 딴 제목으로 만든 영화 <명자 아끼꼬 쏘냐>(이장호 감독)의 제작·주연으로 마지막 작품을 한 뒤 행정가로 변신하여 1995~2000년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을 역임했다. 배우로서만 아니라 영화계 각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을 하여 시대를 앞서간 여장부라 할 수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영화인 명예의 전당에 ‘화려한 여배우’라는 타이틀로 헌액되었는데, 명예의 전당에는 고 신상옥 감독, 고 유현목 감독, 배우 황정순씨에 이어 네번째다.

김지미의 마지막 작품인 <명자 아끼꼬 쏘냐>를 걸작의 재발견이라는 취지하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운영하는 ‘시네마테크’에서 10월8일(14:00), 10월21일(16:30), 두차례 무료 상영한다. 조선여인 ‘명자’가 ‘아끼꼬’, ‘쏘냐’라는 일본식, 소련식 이름을 번갈아 사용하며 살아야 했던 기구한 인생역정을 통해 민족 수난의 역사를 다룬 작품이다.
 
“나는 일제강점기의 질곡을 겪었던 사람들의 수난사를 이 영화보다 더 절박하게 묘사한 한국영화를 본 적이 없다. 나는 이 작품 하나로 사할린 교포들의 삶과 애환을 비로소 절감할 수 있었다. 단순히 소재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그랬다면 걸작의 재발견 운운하기가 좀 난감했을 것이다. 중년의 아끼꼬는 물론이고 고령의 할머니인 쏘냐 역을 대배우 김지미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광복 전후의 60여년을 아우르는 기나긴 세월 속에 한 여자가 겪은 한 많은 개인사를 응축해낸 이장호 감독의 연출 역량을 새삼 재평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영화천국, 김시무(영화평론가) 2010.11.18)
 
커다란 긴장감과 자극적인 흥미를 주지는 못하여 비록 흥행 성적은 저조했었지만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는 작품을 보는 기회를 가지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필자가 이 영화를 본 소감으로는 근대사를 되돌아보고 그 시대를 느끼면서 차분한 감동을 갖게 되는 작품으로서 추천하고 싶다.

◆네번의 결혼, 네번의 이혼

김지미는 완벽한 미모로서만이 아니라 결혼을 여러번 한 것으로도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견주어지곤 했다. 2002년 도미한 뒤로는 홍성기·최무룡 두 남편 사이에서 얻은 두딸, 손자들과 함께 LA에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번째 결혼은 12살 연상인 홍성기 감독과 하였다. 당시 신상옥 감독과 쌍벽을 이루던 최고의 감독이었다. 연기 경험이 없던 김지미는 홍성기 감독을 통하여 연기자로서 성숙해졌다. 최고의 감독과 최고의 미인배우의 결합이었는데, 아내의 인기는 날로 치솟으면서 너무 바빠져서 일주일에 한두번만 집에 들어가는 상황이 되었고 남편 활동은 주춤해졌다. 김지미는 편당 30만원의 출연료를 받으면서 집 두채 값인 600만원을 제작비로 대주었지만 재기가 성공적이지 못하였고, 결국 4년 만에 이혼했다.

두번째로는 당시 인기 정상의 배우 최무룡(12살 연상)과 사랑하게 되었는데 기혼남이었기 때문에 62년 간통죄로 고소당하여 구속되었다. 그 다음해 결혼하여 6년간 결혼생활이 지속되었다. 유명 배우 최민수는 최무룡과 전처 강효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결혼 후 최무룡은 감독으로 변신해 영화를 만들다가 실패하여 빚더미에 앉게 되었으며, 김지미가 떠안을 여러 부담을 덜어주고 톱스타인 아내의 앞길을 막을 수 없다며 이혼을 결정했다. 두사람이 1969년 합의 이혼할 때 인터뷰에서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말을 남긴 것이 두고두고 오랜 세월 동안 명언으로 남아 회자되었다.

세번째 결혼은 7살 연하남이면서 가요 역사상 최고의 인기 남자가수인 나훈아와 이루어졌다(혼인신고를 안했고 결혼은 아니라고 김지미는 말했지만 사람들은 사실혼으로서 결혼으로 간주하였다). 76년 가수 나훈아와의 결혼은 그해 가장 큰 화제로 대두된 쇼킹한 뉴스였다. 나이 차이뿐만 아니라 생김새와 스타일 등 모든 면이 대조적이라서 두사람이 열애에 빠진 것을 사람들은 매우 관심있게 바라보았다. 공식적으로 함께 살면서 두사람은 은둔생활로 들어갔다가 4년 만에 결혼생활을 끝냈다.

 네번째 남편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심장전문의 이종구 박사였다. 이때 김지미 나이는 52세였고 이종구 박사는 8살 위인 60세였다. 어머니가 아파서 병원에 다니다가 알게 된 이 박사가 연애편지를 보내면서 구애를 하였고 결혼에 이르렀다. 결혼 후에는 화려한 명성과 달리 집안에서는 평범한 주부로 지냈다고 한다. 수천만원, 수억원이 오가는 연예계 생활에 비하면 초라할 수도 있는 350만원 월급봉투를 받아들 때마다 그 사람이 한달 동안 노력한 대가라는 점에서 가슴 뭉클해하며 “고맙습니다”하고 말했다고 한다(여성동아, 2003.12.23). 세계적인 배우와 세계적인 의사의 결혼생활은 11년 만에 마무리되었다.
 
◆“결혼, 사람 외 다른 것 보지 말라”

<길소뜸>과 <티켓>으로 서로의 대표작을 만들어준 임권택 감독은 “보통 여자들이 남자에게 선택돼 결혼을 하고 결혼 후에는 남자에게 종속된다는 느낌을 받는데, 김지미는 자기가 남자를 선택했고 또 결혼했다고 해서 남자한테 종속되는 삶을 산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김지미는 인터뷰(중앙일보, 2010. 10.23)에서 “살아보니 남자 별 것 아니더라”, “결혼했지? 만족해요? (기자가 웃으며, 아니요 라고 하자)  그래, 남자는 다 어린애야. 불안하고 부족한 존재지. 여자들이 모성애로 감싸니까 사는 거지. 내가 어린 남자, 나이든 남자 다 살아봤지만 남자는 다 똑같아. 어린애야.” 이런 당찬 얘기를 했다.

스스로 남자를 선택했고 각 분야에서 최고의 남자들과 네번이나 결혼했었던 ‘결혼의 고수’인 그가 궁극적으로 한 말은(2003. 10.28. 울산 MBC 주최 강연) “유명하고, 파워 있고, 능력 있는 사람이 가정을 행복하게 한다고 생각하면 절대 오산입니다. 결혼은 인간 대 인간으로 만나 가장 편한 상대와 해야 한다는 걸 제가 이 나이가 돼서야 깨달았어요. 집안 좋고, 돈이 많다고 해서 그 집에 딸을 시집보내려고 하지 마세요. 딸이 불행해져요. 제겐 조카가 서른두명이 있는데 사람 외에 다른 것은 보지 말라고 말해요. 그 사람의 장래에 희망을 걸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다고요. 완전하게 갖춰진 사람을 만나려고도 하지 말라고 하지요. 완전하게 갖춰진 것을 얻으려면 그만큼 희생이 필요하니까요.”

요즘 결혼 배우자로는 이미 달성해 놓은 외적인 조건을 많이 따지는 시대에 그가 남긴 이런 말은 새겨들을 만하다. 필자의 동창 중 결혼을 빨리 했던 친구의 결혼 직후 집들이 갔을 때 툇마루에 찬장 놓고 단칸셋방에 살면서 꿈을 먹으며 행복하게 살던 두사람 모습이 생각난다. 열심히 힘을 합하여 차근 차근 하나씩 이루어가며 살다보니 세월이 흘러 두사람은 중산층으로 올라서서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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