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서울·강릉도 아닌 파주에도 '율곡'이 있다

송세진의 On the Road / 파주 이이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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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이는 조선 중기에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학자로 대성하고, 관료로서 업적을 쌓았고, 제자양성도 성공했다. 다른 이들이 이 중 한 가지에 치우친 반면 이이는 어느 것도 부족함 없이 일가를 이뤘다. 이이를 만나러 가기로 한다. 그런데 서울도 강릉도 아닌 파주로 간다.

◆율곡리에 율곡이 있다

율곡 이이(1536~1584)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5000원권 지폐 속 인물, 어머니 신사임당, 그리고 십만양병설. 어렵게 3가지를 떠올리고 나니 말이 막힌다. 이이는 유명하지만 그분에 대해 제대로 아는 게 없다. 화폐에 나올 정도면 분명히 뭐가 있을 텐데 사실 십만양병설도 자세히는 모르겠다. 그렇다면 이이는 군인인가? 이이는 조선시대의 대표 성리학자이자 정치가였고, 앞서 말한 십만양병설을 비롯해 대동법, 사창의 설치 등 정치·경제·사회에 두루 변화를 주장한 정치개혁가다.

그러면 이이의 고향은 강릉인가? 아니, 신사임당의 고향이다. 이이는 강릉 오죽헌에서 태어났고 신사임당이 아들 없는 친정의 ‘아들잡이’라 하여 남편의 동의를 얻어 강릉에 머물렀다. 이후 율곡은 파주 율곡리에서 어린시절을 보낸다. 이율곡이 율곡리로 왔다? 그렇다. 이이의 호 ‘율곡’은 동네 이름에서 온 것이다. 한글로 율곡은 ‘밤나무골’이다. 그러니까 율곡은 ‘밤나무골 이이 선생’인 것이다. 율곡은 평생 동안 강릉뿐 아니라 금강산, 한양, 황해도 해주 등 여러 곳에 머물지만 사후에는 이곳 율곡리에 영면했다.

성리학자 율곡에게는 특이한 이력이 있다. 16세에 어머니 별세 후 3년상을 치르고 금강산에 입산해 불교에 입문했다. 정신적 지주였던 어머니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자 그에게도 큰 시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공부한 불교의 선학이 후에 자신의 성리학 체계를 세우는 데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지만 반면 성리학자로서 평생 그를 괴롭히는 이력이 되기도 한다. 이후 그는 11가지 조항으로 된 ‘자경문’을 만들어 평생 동안 스스로를 돌아보고 수신했다. 이 때문인지 율곡 이이의 졸기를 보면 ‘성품이 탁월하고, 수양이 깊어서 명랑하고 화기에 찼으며… 대인 접물에서 오직 성신으로 일관했고…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예언이 모두 들어맞았고, 그가 건의한 정책은 후에 모두 채택됐다’고 나와 있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명랑하고 화기에 찼다’는 내용이다. 그는 진지한 학자였고, 때로는 강하게 개혁을 주장하는 정치가였지만 사람들에게 좋은 에너지를 주는 명랑한 사람이었나 보다. 요즘 말로 하면 성격 좋고, 공부 잘 하고, 글 잘 쓰고, 놀 줄도 아는 ‘엄친아’. 매력적인 천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자운서원
자운서원
율곡 이이 가족 묘
율곡 이이 가족 묘

◆그분의 묘, 그분의 서원

율곡 이이 유적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뉜다. 위쪽으로 이이 가족묘역이 있고, 왼편 아래쪽에 자운서원, 입구 가까이에 율곡기념관이 있다. 제일 먼저 발길이 향하는 곳은 묘다. 천천히 경사가 생기는데, 양쪽으로 키 큰 소나무 숲이 상쾌하다. 묘역에 오르면 14기의 묘가 있는데, 율곡 선생을 비롯한 그 가족들 묘다.

특이한 점은 가장 높은 곳에 이이가 있고, 바로 아래에 부인 곡산노씨 묘가 있다. 그 아래로 율곡의 맏형네 묘가 있고, 그 아래로 아버지 이원수와 신사임당의 합장 묘가 있다. 가장 아래엔 율곡 아들네 묘가 자리 잡고 있다. 한마디로 출세 순인가? 묘의 위치를 두고 여러가지 의견이 있는데, 조선 중기 이전만 해도 자식이 현달하면 서열에 관계없이 묘를 쓰던 고려 때의 풍습을 따른 것이 아닌가 한다. 어쨌든 가장 높이 있는 율곡 선생의 묘에 참배하고 나서는 반드시 뒤를 한번 돌아봐야 한다. 이곳에 오는 동안 점점 급해진 경사는 마침내 작은 언덕 하나를 다 오른 셈이 되고, 그 만큼의 높이가 된다. 그러니 멋진 풍경을 즐겨야 맛이다. 파주의 논과 밭, 개천과 저수지, 마을, 멀리 보이는 산까지 확실한 원근감으로 눈에 들어온다. 율곡 선생 앞에서 이 좋은 기운을 함께 받아가야 하지 않겠나.

자운서원은 이율곡, 김장생, 박세채를 배향한 곳이다. 광해군 7년(1615년) 유림들에 의해 창건됐고, 효종 원년(1650년)에 ‘자운’이라는 현판을 내려 사액서원이 됐다. 이이는 학문적으로 큰 존경을 받은 만큼 강릉의 송담서원, 풍덕의 구암서원 등 전국 20여개 서원에 배향됐다. 자운서원 풍경의 백미는 강인당 양쪽에 자리잡은 두 그루의 느티나무이다. 400년이 넘은 이 느티나무들은 복원된 서원의 어색함을 한방에 날려준다.

잠시 서원을 둘러보며 율곡 선생의 책 <격몽요결>의 내용을 떠올려 본다. ‘내가 오래도록 인순(因循)하게 됨을 걱정하며 스스로 경계하고 반성하기 위하여 이 책을 쓴다.’

인순은 지금 말로 게으름, 매너리즘을 뜻한다. 율곡 선생이 이 책을 집필한 42세 때는 이미 여러 가지를 이뤘을 시기인데, 그는 언제나 스스로를 다잡고 경계했다. 선생이 존경 받는 이유를 알겠다.

자운서원 안팎으로는 우암 송시열이 짓고 명필 김수증이 쓴 ‘자운서원 묘정비’와 이항복이 짓고 신익성이 쓴 ‘율곡 이이 신도비’가 있어 율곡 선생의 위상을 한번 더 증명한다. 생각보다 부지가 넓은 이 유적은 작년에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됐다. 각 유적을 연결하는 산책로와 연못, 꽃과 의자, 솟대들은 그저 뜻 모르고 가도 편안한 쉼터가 되어준다.

화석정
화석정
율곡 이이 유적
율곡 이이 유적

◆흥망성쇠를 간직한 화석정

화석정은 정자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알려준다. 앞으로는 임진강이, 한쪽으로는 서울의 삼각산이, 저 멀리 개성의 오관산이 아득하게 보인다. 높지 않은 곳에 이런 풍경이 있으니 여행자는 편한 호흡으로 주변을 즐길 수 있다. 이곳에서 이이가 성장기에 학문을 익혔고,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제자들과 시를 짓고 학문을 논했다. 또 율곡의 학문에 반한 중국의 황홍헌이 칙사로 왔을 때 화석정에 와서 시를 읊고 자연을 즐겼다고도 한다. 정자 안에는 8줄짜리 한시가 적힌 편액이 있는데, 내용은 이이가 여덟살 때 지었다는 시다.

화석정은 평화로운 그림처럼 자리잡고 있지만 꽤 모진 풍파를 겪었다. 대표적으로 선조가 임진왜란 당시 피난을 갈 때였다. 한밤중에 강을 건너려고 하자 강가는 칠흙처럼 어두웠고, 이들은 화석정을 불 태워 주위를 밝혔다고 한다. 이이는 일찍이 왜의 침략을 대비해 십만양병설을 주장했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은 왕이 바로 선조다. 7년 후 전란이 닥치자 왕은 백성을 버리고 도망가던 길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피난길을 밝히기 위해 충언을 했던 신하의 정자를 불태웠다. 이후에도 화석정은 한국전쟁으로 소실된다. 지금의 정자는 파주시 유림들이 복원한 것이다. 화석정 옆으로는 560년 된 느티나무가 높게 자라 그 동안의 이야기를 회상하고 있는 듯하다.

여행을 할수록 우리 역사를 참 몰랐다는 것을 깨닫는다. 5000원권으로만 기억하던 율곡 이이는 20살에 자경문을 만들어 평생을 수신했고, 사람들에게 유쾌한 에너지를 나눠 줄줄 아는 매력적인 엘리트였고, 스승이었다. 지금 우리는 존경하는 어른이 있나? 자신을 되돌아 보는 겸손함이 있나? 사람을 성심으로 대하는 마음이 있나? 율곡리에서 만난 큰 선생은 여행자에게 결코 가볍지 않은 질문을 하고 있다.
 

● 여행 정보

☞ 파주 이이 유적지 가는 법
강변북로 - 자유로 - ‘내포리’ 방면으로 우회전 - 문현말길 - ‘차량등록사업소, 문산’ 방면으로 좌회전 - 방촌로 - 임월교에서 ‘파주소방서, 문산지구대, 파주차량사업소’ 방면으로 우회전 - 개포래로 - 문산로 - 문향로 - ‘적성, 화석정, 율곡선생유적지, 서울’ 방면으로 우회전 - 문산역로 - 우계로 - 좌운서원로 진입

☞ 대중교통
명동입구에서 9710번 승차 - 문산종점 하차 - 11번 승차 - 자운서원 앞 하차
서울역에서 909번 승차 - 문산종점 하차 - 11번 승차 - 자운서원 앞 하차

[주요 스팟 내비게이션 정보]
파주 이이 유적: 검색어 ‘파주 이이 유적’ / 경기도 파주시 법원읍 자운서원로 204
화석정: 검색어 ‘화석정’ /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산 100-1

< 주요 정보 >
파주 이이 유적
031-958-1749
입장료: 19~64세 1000원 / 6~18세, 군인·경찰 500원
관람시간: 오전 9시 ~ 오후 6시 (월요일 휴관)

화석정
031-952-9233
입장료 무료, 주차장 무료(주차장이 협소함)

파주시문화관광
http://tour.paju.go.kr / 대표전화:120

< 주변 여행지 >
임진각 평화누리공원과 DMZ 관광
임진각에서 출발하는 DMZ관광은 제 3땅굴을 비롯해 민간인 통제구역을 견학하는 것으로 반드시 신분증을 준비해야 한다. 열차로 도라산역에 갈 때는 도라산역 대합실에서 군검색을 받게 된다.
자세한 사항은 파주시문화관광 사이트나 판문점 DMZ 관광 사이트 참고
http://www.tourdmz.com / 관광문의, 예약: 02-755-0073

< 음식 >
오두산막국수: 만화 ‘식객’에 등장해 유명해진 집으로 물막국수가 깔끔하고 맛있다.
물막국수 6000원 / 비빔막국수 6500원 / 메밀전 6000원
(문산통일로점)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봉서리 474-9 / 031-952-5232
화석정가든: 화석정 바로 앞에 위치해 교통이 편리하고, 잡어매운탕, 임진강 민물참게장 등 이 지역에서 맛볼 수 있는 식사를 제공한다.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율곡리 515번지 / 031-952-1818

☞ 본 기사는 <머니위크>(www.moneyweek.co.kr) 제334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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