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양도성] 선비의 풍류, 왕후의 눈물 맺힌 곳

한양도성 해설기 ⑥ / 혜화문에서 광희문까지(비우당 팔경과 동망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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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도 순성(巡城) 놀이라는 것이 있었다. 새벽에 도시락을 싸들고 5만9500척(尺)의 전 구간을 돌아 저녁에 귀가했다. 도성의 안팎을 조망하는 것은 세사번뇌에 찌든 심신을 씻고 호연지기까지 길러주는 청량제의 구실을 하는 데 부족함이 없다. 현재 서울은 도성을 따라 녹지대가 형성된 생태도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충분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복원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해설은 과거와 현재의 대화다. 수년간 한양도성을 해설한 필자가 생생하게 전하는 도성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주>


낙산 동쪽 상산(商山)의 한줄기인 지봉(芝峯) 산자락에는 비우당(庇雨堂)이 있다. 조선 초 청백리 류관(柳寬)이 살았던 집이다. 장마철마다 우산을 써서 빗물을 피했고 그때마다 그는 부인에게 “우산 없는 집은 어떻게 살까”라며 농담을 해 ‘류 재상의 우산’이라는 고사가 회자됐다. 그는 황희, 맹사성의 명성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그들과 함께 삼대 청백리로 추앙받는 정승이었다.

이곳은 그의 5대 외손이자 조선 후기 실학자 이수광이 선조의 거룩한 뜻을 받들어 ‘비를 겨우 가릴 수 있는 집’이라는 의미로 이름을 지었고 <지봉유설>을 저술한 곳으로도 알려졌다. 그는 임진왜란 때 비우당이 소실되자 집을 새로 짓고 이 일대의 여덟곳을 ‘비우당 팔경’이라는 시로 읊었다. 낙산 주변의 풍광이며 조선시대 선비의 풍류와 사상을 잘 나타냈다.


비우당. /사진제공=허창무 한양도성 해설가
비우당. /사진제공=허창무 한양도성 해설가

첫째, 동지세류(東池細柳)란 시에서는 흥인문 밖 못가에 핀 버들이 봄바람에 가지를 날리고 꾀꼬리가 지저귀는 모습을 노래했다. 둘째, 북령소송(北嶺疎松)에서는 북악의 산마루가 낮에도 늘 어둑한데 푸른 솔가지가 집에 드리운 것을 보고 동량으로 쓰이지 못함을 한탄했다. 셋째, 타락청운(駝酪晴雲)에서는 아침마다 누운 채 타락산의 구름을 마주하면서 한가로운 구름처럼 살고 싶다고 했고 넷째, 아차모우(峨嵯暮雨)에서는 아차산에서 벌판을 지나 불어오는 저녁비를 노래했다. 다섯째, 전계세족(前溪洗足)에서는 비가 오면 앞개울에 나가 발을 씻고 여섯째, 후포채지(後圃埰芝)에서는 지봉(芝峯)과 상산(商山)의 이름에 맞춰 상산사호(진시황 때 난리를 피해 섬서성 상산의 깊은 산중에 숨어 살았다는 은사 네 사람을 말함)처럼 살고 싶다고 했다. 일곱째, 암동심화(巖洞尋花)에서는 복사꽃 핀 골짜기에서 나비 따라 꽃을 찾아가는 풍류를 노래했다. 마지막 산정대월(山亭待月)은 맑은 정자에 올라 술잔을 잡는 흥취를 읊었다. 옛사람의 풍류를 이처럼 잘 표현할 수 있을까. 물론 이상향을 동경하는 시지만 각박한 요즘 세상에서는 시샘이 날 만큼 유유자적하는 정취다.

◆동망봉과 정순왕후 송(宋)씨

창신동 성곽길가 정자에서 동쪽으로 동망봉(東望峰)을 바라본다. 낙산 동쪽 기슭 숭인동 동망봉 부근엔 청룡사라는 오래된 절이 있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돼 궁궐에서 쫓겨날 때 정순왕후 송씨(定順王后 宋氏)도 군부인이 됐다. 동망봉은 송씨가 강원도 영월 청령포로 유배된 남편 노산군을 그리워하면서 눈물짓던 곳이다.


동망정. /사진제공=허창무 한양도성 해설가
동망정. /사진제공=허창무 한양도성 해설가

송씨가 왕비가 된 때는 단종이 즉위(1452년 5월)한 지 2년째인 1454년 1월이었다. 그때 단종의 나이는 14세, 왕후의 나이는 15세였다.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이 호시탐탐 왕위를 노리던 중에 한미한 집안의 딸인 송씨를 간택해 서둘러 결혼을 시켰다. 모친도 없는 조카를 상왕으로 올리려면 왕비라도 있어야 도덕적 타격을 덜 입을 거라 생각한 게 아닐까. 단종은 재위 3년 만에 세조에게 양위했고 상왕으로 밀려난 지 2년(1457년 7월) 만에 사육신의 복위사건으로 노산군으로 격하됐다. 유배지인 청령포에서 5개월 만에 다시 금성대군의 복위사건이 터져 서인으로 강등되고 곧 사사됐다. 단종이 비참한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왕비는 소복을 입고 아침저녁으로 통곡했다. 그 소리가 주변 아낙네들의 마음을 울려 동네 아낙네들도 땅과 가슴을 치며 통곡했다고 한다.

홀로 된 왕비는 끼니를 잇기가 어려워 시녀들이 동냥해온 음식이나 풀뿌리와 나무껍질로 연명했다고 한다. 이런 사정을 들은 세조가 영빈정이라는 집과 곡식을 하사했으나 정순왕후는 받지 않았다. 의지할 곳이라고는 정업원(淨業院: 본래의 정업원은 창덕궁 뒤에 있었음) 구실을 했던 청룡사뿐이었다.

동묘 여인시장의 여성상인들은 이를 가엾게 여겨 비단에 물감 들이는 일을 맡겼다. 그녀는 따라온 시녀들과 함께 비우당 뒤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샘물에 지초(芝草) 뿌리를 풀어 자주색 염색을 했고 염색업은 폐비의 생업이 됐다. 그렇게 82세까지 장수하면서 세조, 덕종, 예종, 연산군 등 세조의 자손들이 몰락하는 과정을 한 서린 눈으로 지켜봤다.


낙산성곽. /사진=박찬규 기자
낙산성곽. /사진=박찬규 기자

◆구리 왕씨와 먹골배

사육신의 복위사건으로 죄인이 된 노산군과 정순왕후가 헤어질 때의 사연도 눈물겹다. 영월로 유배돼 한양을 떠나기 전날 청룡사로 찾아온 단종은 폐비와 이승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냈다. 다음날 아침 정순왕후는 유배지로 함께 가겠다고 따라나섰지만 청계천 7가 영도교(永渡橋)에 이르러 포졸들의 제지로 무산됐다. 그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그 눈물자국들이 지금도 영도교 위에 있다고 한다. 훗날 21대 영조는 청룡사를 찾아 정순왕후의 고결한 생애를 기리는 정업원구기비(淨業院舊基碑)를 세웠고 그 비석은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여기에 또 한가지 기억해야 할 인물이 있다. 청령포에 유배된 노산군에게 사약을 가져간 의금부도사 왕방연이다. 1457년 10월24일 사약을 가져온 왕방연이 감히 사약을 진어하지 못하고 오열할 때 노산군을 모시던 관노 공생(貢生)이 노산군의 뒤로 돌아가 활시위로 목을 졸라 죽였다. 비운의 노산군은 17세의 어린 나이에 이렇게 세상을 떠났다.
왕방연은 노산군의 장례를 치르고 돌아오면서 서글픈 마음을 달래는 시조 한 수를 지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그는 귀경하자마자 사의를 밝히고 경기도 구리로 내려가 배 농사를 지으면서 지난날의 회한을 달랬다. 사약을 받기 전에 노산군이 물 한 모금을 달라고 하는 것을 죄인이 무슨 물을 찾느냐고 냉대한 일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그는 해마다 첫 수확한 배를 들고 동쪽 영월을 향해 망자에게 경배하면서 사약을 받을 때 못 드린 물 대신 배즙을 드시라고 사죄했다. 그 배가 오늘날 먹골배가 됐으며 그는 구리 왕씨의 시조가 됐다고 한다.

☞ 본 기사는 <머니S>(www.moneys.news) 제47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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