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칼럼] '남한산성'이 '명량'에 못 미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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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6년 12월16일 인조가 청나라 홍타이지 군대에 쫓겨 도망치듯 한양도성을 떠나 칼바람이 몰아치는 남한산성에 47일간 머물렀다. 청의 12만 대군이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순식간에 한양 근처에 도달했고 강화도로 피신하려던 임금 일행은 청군에 의해 길이 막혔다는 소식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병자호란을 치렀다.

인조는 1월30일 청태종 앞에서 3번 무릎을 꿇었다. 무릎을 꿇을 때마다 3번씩 총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까지 했다. 우리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사건 중 하나로 기록된 '삼전도 굴욕'이다.

병자호란은 청나라의 제안을 무시하고 명나라를 가까이 하면서 일어났다. 실리보다 명분을 중시하는 서인 일파의 반정으로 인조가 임금이 돼 광해군시대 대외정책을 바꾸며 초래한 결과다.


영화 <남한산성> /사진제공=CJ 엔터테인먼트
영화 <남한산성> /사진제공=CJ 엔터테인먼트

◆'패배한 전쟁'의 영화

세계적으로 외세의 침략·탄압에 의한 민족 비극의 역사를 바탕으로 제작한 영화들은 대박을 낸 사례가 많다. 조선의 비극을 다룬 영화 <남한산성>도 기대가 컸다. 그러나 김훈 작가의 소설이 원작인 <남한산성>은 제작비 150억원의 손익분기점인 500만명에 못 미치는 385만명 관객이 들어 적자가 났다.

전문가들은 한폭의 동양화 같은 영상미, 절제된 연출, 김윤석·이병헌을 비롯한 배우들의 호연 등 호평을 쏟아냈지만 영화를 본 관객의 평은 호불호가 갈렸다.

선조시대 전쟁영화 <명량>은 200억원을 투입해 6배 수익을 올리는 대박을 터뜨린 바 있다. 그런 만큼 인조시대 전쟁을 바탕으로 한 <남한산성> 역시 이 같은 성공을 따라가리라 예상됐다. 그러나 청나라에 대응하는 문제를 놓고 벌어지는 척화파 김상헌과 화의파 최명길의 논리적인 대결에 현대사를 중첩시켜 이를 관심 있게 본 사람이 아니라면 <명량>만큼 전투신이 화려하지 않고 전쟁 속 휴머니즘·로맨스도 부족한 이야기에 다소 지루함을 느꼈을 수 있다.

병자호란 후 15년이나 더 살면서 82세까지 장수한 김상헌을 임금이 항복하면서 자결한 것으로 묘사하는 등 중요한 부분에서 역사 왜곡이 이뤄져 실망감도 줬다.

<명량>은 승리한 전쟁의 영화지만 <남한산성>은 패배한 전쟁을 담았다. 해피엔딩이 아닌 새드엔딩 영화는 머리로 생각하게 만들기보다는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고 눈시울을 젖게 하면서 감성을 파고들어야 한다. 불행한 결말로 이어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에 치중하면 흥행에서 멀어지기 쉽다. 비극성을 부각시켜 마음으로 느끼게 해야 한다. 유대인이 겪은 홀로코스트나 흑인 노예시대가 배경인 영화들이 그러했다.

6.25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 중 <태극기 휘날리며>는 형제를 통해 동족상잔의 비극을 부각시켜 눈물샘을 자극, 한국영화 사상 두번째로 1000만 관객을 돌파했다. 한국영화 역대 흥행 순위 2위 <국제시장>은 전쟁 때문에 헤어진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로 관객을 흐느끼게 만들었다.


영화 <명량> /사진제공=CJ 엔터테인먼트
영화 <명량> /사진제공=CJ 엔터테인먼트
영화 <국제시장> /사진제공=CJ 엔터테인먼트
영화 <국제시장> /사진제공=CJ 엔터테인먼트

◆'백성이 겪은' 병자호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가 다시 나온다면 정사(正史)인 <인조실록>, 정약용이 정리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역사학자인 한명기 명지대학교 사학과 교수의 <역사평설 병자호란> 등에 바탕을 두고 전쟁으로 인한 개인의 비극을 부각시키는 게 낫겠다. 병자호란의 역사에는 가슴을 후벼 파고 눈시울 뜨겁게 만드는 사연이 많기 때문이다.

<역사평설 병자호란>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남한산성에서 포위된 채 곤경이 길어지자 이상한 행동을 벌이는 자들에 대한 묘사다. “김언림이 청군 진영을 습격해 적의 수급(首級)을 베어오겠다며 성을 내려갔다. 그가 들고 온 수급 하나가 이상해 모두 의아해 하는데 권촉이 갑자기 통곡하기 시작했다. 자기 형의 머리라는 것이었다. 주변의 장졸들은 경악했다. 김언림은 청군의 수급이 아니라 조선군 시신에서 목을 베어왔던 것이다.”

항복하지 말고 최후의 결전을 벌이자는 군신들이 청나라에 보내고자 했던 국서도 마음을 울린다. “노약자들을 먼저 죽이고 남은 양식을 모두 태워 버린 뒤 날랜 장정을 뽑아 그대들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고자 한다. 남한산성이야 완전히 망할지 모르지만 남은 사람들은 들고 일어나 자식은 아비의 원수를 갚고, 아우는 형의 원수를 갚고, 신하는 임금의 원수를 갚을 것이다. 그대들은 부질없이 만대의 원한만 맺게 될 것이다.”

영화에서는 청군의 잔혹함에 대한 묘사가 부족했지만 실제로는 처참한 장면이 많다. “청군이 몰려오자 여자들은 정절을 지키기 위해 도망치다가, 혹은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때로는 지아비와 아들의 강요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권순장은 불붙은 화약 더미에 뛰어들어 목숨을 끊었다. 아내는 스스로 목을 매기 전 세 딸을 먼저 목매어 죽였다. 누이동생도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 청군은 젊고 고운 여인들을 사로잡느라 혈안이 됐는데 그 와중에 희생자가 속출했다. 사대부가의 부인들이 모두 포로가 됐다.”

청군은 강화도성에서 잡은 포로들을 남한산성으로 몰고 가면서도 대대적인 노략질을 감행했다. 이날의 참상을 기록한 사서를 보면 “청군은 관청과 여염에 불을 지르고 반항하는 사람들을 도륙했다. 시체가 쌓여 들판에 깔리고 피는 강물을 이뤘다. 눈 위를 기어 다니거나, 죽거나, 죽은 어미젖을 빨고 있는 아이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인조가 청군에 항복하고 청군 병력 호위 속에 잠실 벌판을 지나 도성으로 돌아올 때는 “청군에 잡혀 있던 수많은 포로가 인조를 향해 울면서 절규했다.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시나이까?’ 인조는 백성들의 절규를 뒤로 한 채 도성으로 향했다.”

임금과 일부 대신은 항복하고 살아남아 계속 자리를 보존하는 동안 청에 끌려간 수십만명에 달하는 백성이 겪은 고통은 죽음보다 더 심했다고 기록됐다. “조선의 피로인이 무엇인가 호소하려 하면 청군이 철퇴로 때려 참혹한 정상을 차마 볼 수가 없다. 어떤 이는 벌써 살해당했고, 어떤 이는 화살을 맞았는데 목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고, 어떤 이는 전하를 향해 합장하고 비는 등 비참한 장면들뿐이다.”

피로인들에게 가장 무서운 적은 추위였다. “수백명 단위로 열을 지은 채 엄중한 감시 속 심양을 향해 행군했다. 피로인 수가 워낙 많아 하루에 10여리밖에 행군할 수 없었다. 심양에 오기까지 60일 동안 옷을 벗지 못한 채 자야 했기에 온몸에 이가 들끓었다.”

피로인 중 여성이 겪어야 했던 고통은 더욱 처참했다. 사로잡힌 뒤 능욕을 당하거나 저항하다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다. “청군의 체포와 능욕을 피하기 위해 수많은 여인이 바다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워낙 많은 여인이 몸을 던졌기 때문에 ‘여인들의 머릿수건이 바다에 떠 있는 것이 마치 연못 위 낙엽이 바람 따라 떠다니는 것 같다’고 묘사됐다.”

피로인을 데려올 방법은 청 측 주인에게 몸값을 치르고 데려오는 속환(贖還)이 유일했다. “피로인을 사고파는 ‘인간시장’이 섰고, 몸값 흥정하는 과정에서 ‘상품’이 됐다. 심양의 인간시장에는 혈육을 데려가려는 소망을 품고 많은 원속인(願贖人)이 모여들었지만 그들은 곧 절망하고 만다. 속환가가 최소 수백냥에서 천냥 단위까지 폭등했기 때문이다. 속환가를 마련할 방도가 없어 압록강 너머 만주 땅을 바라보면서 눈물 훔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처참한 장면이었다.”

많은 수의 사람이 청나라에 잡혀갔기에 심양에서 도망치는 조선 피로인(주회인)이 매일 1000명에 이르렀다. “도망자들은 낮에는 산 속 등지에 숨어 있다가 밤에 이동했다. 이동 도중 굶어 죽을 위험성이 높았고 산 속에서 맹수를 만나 희생되기도 했다. 만주지역을 통과해도 압록강변에 이르면 변방 관리들이 청의 힐책을 우려해 도강을 허용하지 않았다. 압록강까지만 도착하면 조선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주회인들은 절망에 빠진다. 강을 건널 수 없어 좌절한 주회인들 가운데 강물에 뛰어들거나 목을 매어 자살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압록강 줄기의 위아래에 백골이 널려 있었다.”

탈출을 시도하다 붙잡히면 가혹한 처벌이 기다리고 있었다. 탈출에 실패하면 심양으로 다시 끌려가 발뒤꿈치를 잘렸다.

이처럼 병자호란에서 백성들이 겪었던 고통은 끔찍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시대 상황에 맞지 않게 청을 배척하고 명나라를 추종하던 척화파 김상헌의 충절과 고뇌를 다룬 영화는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뒀지만 역사적 사실에 기초하면서 인조의 무능으로 백성들이 겪게 된 슬프고 처절한 사연들을 부각시키는 영화가 잘 만들어진다면 흥행몰이가 가능할 것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23호(2018년 1월17~23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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