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 ⑫ '부외자멸' 북학파, 훈민정음 버리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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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어떻게 식민지배와 6·25전쟁으로 인한 자산파괴를 단기간에 극복하고 세계 10대 경제대국과 민주화를 달성했을까. 삼성전자는 어떻게 반도체와 휴대폰에서 세계 1위가 됐고 방탄소년단은 어떻게 빌보드차트 1위에 올라 K-Pop 열풍을 전 세계로 확산시켰을까. 불과 50년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한 것으로 당연시됐던 일이 기적처럼 현실이 되는 배경엔 무엇이 있을까. ‘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에선 그런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우리의 인문학적 바탕을 찾아본다. -편집자-
/사진=이미지투데이
/사진=이미지투데이

“중국어는 문자의 근본이다 … <중략> … 우리나라는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글자 소리가 중국 글자 소리와 대략 같다. 그러므로 온 나라 사람이 본래 사용하는 말을 버린다고 해도 안 될 이치가 없다. 그런 연후에야 이(夷)라는 한 글자를 면할 수 있다. 이 어찌 상쾌한 일이 아닌가?”

홍대용, 박지원과 함께 조선 후기 북학파의 3두 마차 가운에 하나였던 박제가가 쓴 <북학의> ‘한어’편에 나오는 말이다. 이는 ‘우리글 즉 훈민정음을 버리고 중국어를 국어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대왕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충격적인 말을 태연히 한다.

홍대용도 비슷한 말을 했다. 그는 중국에 파견되는 사신으로 연경(지금의 베이징) 가는 길에 만난 청나라 유생 손유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중국을 사모하고 존숭하며 의관문물이 중화를 방불케 하여 예로부터 중국에서 소중화라고 부르지만 언어만은 아직도 이풍(오랑캐 풍습)을 면치 못했으니 부끄럽기 짝이 없는 일입니다.” <담헌집>

◆훈민정음 폐지하자던 두사람

홍대용의 이런 말에 손유의는 점잖게 한마디 했다. “토음(土音, 조선지방의 중국어 음운)은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중국도 동서남북의 언어가 같지 않지만 조정에서 선비를 뽑아 쓸 때 그것으로 차별하지 않습니다.” 

박제가와 홍대용 같은 자기 문화 멸시는 박지원에게도 나타난다. 그는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 오며 쓴 여행기인 <열하일기>에서 “나는 중국의 장관을 이렇게 말하리라. 정말 장관은 깨진 기와조각에 있었고 정말 장관은 냄새나는 똥거름에 있었다”고 말했다.

이는 “천하를 다스리는 사람은 진실로 인민에게 이롭고 국가를 두텁게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법이 오랑캐에게서 나왔다 하더라도 이를 본받아야 한다”는 주장 뒤에 나오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가 참으로 오랑캐를 물리치려면 중국 유제(遺制)를 모조리 배워 우리의 어리석고 고루하며 거친 습속부터 바꾸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라고도 썼다.

그는 또 허생의 입을 빌려 “입는 옷이란 모두 흰옷이니 이는 상복이고 머리는 송곳처럼 뾰쪽하게 묶었으니 이는 남쪽 오랑캐의 방망이 상투이거늘 무슨 놈의 예법이란 말인가 … 지금 명나라를 위해 복수하려고 하면서 그까짓 상투 하나를 아까워한단 말이냐”고 꼬집는다. 박지원의 이런 말은 청국에 대한 새로운 사대를 당연한 것 또는 사물의 질서라고 주장하는 것과 같다.

홍대용,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는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청의 발달된 기술과 시장경제를 직접 봤다. 특히 중국 최고의 전성기라고 할 수 있는 건륭제 때의 앞선 문물에 충격을 받고 기술개발과 상공업 진흥을 주장했다.

◆북학파, 친일개화파의 부끄러운 선조

하지만 북학파는 신분제를 폐지하려 하지 않았다. 연경을 다녀왔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이미 신분제를 없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반상차별이나 귀천차별에 기초한 신분제에 대해서는 오불관언이었다. 박지원은 <호질>과 <양반전>에서 놀고먹거나 생계능력이 없으면서 글만 읽는 가난한 양반의 위선과 허례 및 월권 등을 조롱하고 풍자했지만 신분철폐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당시 삼정문란의 핵심으로 떠오를 토지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도 전혀 따지지 않았다.

대신 북학파들은 청의 문물을 극구 찬양하면서 조선의 풍속을 비하하는 부외자멸(附外自蔑·외세에 붙어 스스로를 멸시함)적 사대주의에 빠져들었다. 비극은 북학파가 적극 배우자던 18세기 후반의 청은 이미 사양길에 접어들었다는 사실이다. 조선 백성을 사랑하고 조선을 개혁하려는 절실함보다는 눈에 보이는 모습에 넋을 빼앗겨 조선의 당면과제 해결방안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한 것.

이런 사대주의는 박지원의 손자이자 개화파의 창시자로 알려진 박규수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그는 동방예의지국이라는 조선의 자부심을 경멸하며 몰락한 중국 대신 새롭게 떠오른 미국을 예양의 나라로 칭송했다. 또 신흥 제국주의 국가로 부상한 왜국에 대해서도 아무런 불가침 약속도 받지 않은 채 개국을 주장하는 굴욕적 유화자세를 보였다.

그의 ‘잘못된 개화사상’에 물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은 일본의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후쿠자와 유키치의 꼬임에 넘어가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김홍집, 김윤식, 유길준, 윤웅렬, 어윤중, 윤치호 등도 우리 문화를 경멸하고 왜국을 찬양하며 친일괴뢰 노릇을 하다 친일매국노가 됐다.

북학파의 사대 대상이었던 청국 자리에 일본을 세워 스스로 조아린 꼴과 다름없다. 이들은 결국 일제의 침략의도를 전혀 읽지 못하고 ‘일제에 의한 한국의 독립’을 부르짓다 공멸의 길로 민족을 밀어넣었다. 이들이 내세운 개화론의 본질은 민족국가와 국민국가를 건설하는 시대적 과업이 아니라 개화의 이름으로 나라를 외국에 팔아먹는 것이었다.
/사진=이미지투데이
/사진=이미지투데이

◆패치워크 대신 사대주의에 취한 비극

홍대용, 박제가의 훈민정음 폐지론과 박지원 및 개화파의 사대주의의 비극은 ‘내 것에 대한 사랑과 존중’이 없기 때문에 싹튼 것이다. 이는 대한민국을 미국의 51번째 주로 편입시키고 영어를 공용어로 쓰자고 했던 미친 주장과 영어 발음을 잘하기 위해 혓바닥 수술을 하자고 목소리 높였던 미친 짓과 비슷한 맥락이다.

사회변혁기의 진정한 개혁은 치열한 반성을 통해 버려야 할 악폐와 지키고 발전시킬 좋은 점을 가려낸 뒤 좋은 것을 바탕으로 외국의 앞선 문물을 받아들여 한 단계 높은 것을 만들어 내는 구본신참(舊本新參)의 자세에서 나온다. 그 자세가 있어야 변화무쌍한 미래를 지배할 수 있는 새로운 해법을 패치워크(짜깁기)할 수 있다.

북학파와 개화파가 성공하지 못하고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까닭은 패치워크 대신 사대주의를 택했기 때문이다. ‘아는 게 병’이라는 ‘식자우환’은 이와 같은 헛똑똑이들 때문에 나온 격언이다. 21세기 4차 산업혁명기로 접어든 지금 우리 사회도 부외자멸적 사대주의가 팽배한 게 아닐까 하는 우려는 필자만의 기우일까.

☞ 본 기사는 <머니S> 추석합본호(제558·55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홍찬선 전 머니투데이 편집국장
홍찬선 전 머니투데이 편집국장 star@mt.co.kr

바퀴, 날개달린 모든 것을 취재하는 모빌리티팀 박찬규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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