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의 패치워크 인문학-36] 흔들리는 브레튼우즈 체제와 ‘역사 우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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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대한독립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지난 2월27일에 개봉한 영화 <항거-유관순 이야기>는 우리를 슬프게 한다. 

유관순(고아성 분)이 서대문형무소 8호실에서 겪은 일제의 고문이 105분 동안 이어지며 우리들의 가슴을 저민다. 발길질 몽둥이찜질은 예사고 손톱 으깨기, 서 있는 관에 1주일 가두기 등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고문에 할 말을 잃고 일제에 분노가 치솟는다. 

‘먹고살기 위해서’라는 핑계 아래 일제 헌병이 돼 고문에 앞장선 자들이 해방 후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독립투사들에게 죄송한 마음을 누를 길 없다. 

다만 아쉬운 것은 영화가 우리 일상에 알게 모르게 스며들어 있는 ‘역사우울증’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점이다. 아픈 역사를 더욱 고통스럽게만 함으로써 절망하게 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꿈과 희망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유관순이 주도한 ‘아우내 만세운동’에서 일제와 평화적으로 싸우는 모습을 좀더 역동적이고 미래지향적으로 보여줬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또 유관순이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면서 “우리는 조선의 독립과 조선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고 하는데, 이는 ‘대한의 독립과 대한인이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라고 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가 외친 구호는 ‘조선독립만세’가 아니라 ‘대한독립만세’였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기미독립선언서가 전시되어 있다. /사진=뉴스1 박정호 기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기미독립선언서가 전시되어 있다. /사진=뉴스1 박정호 기자

◆‘식민프레임’의 잔재

역사우울증을 이해하기 위해 병자호란을 다룬 영화 <최종병기 활>과 <남한산성>을 비교해 보자. <최종병기 활>에서 남이(박해일 분)는 적장 쥬신타(류승룡 분)와 목숨을 건 ‘활의 전쟁’을 벌이고 마침내 승리한다. 비록 실제 병자호란에서는 패배했지만, 가상의 활의 전쟁에서 이김으로써 패배한 역사에서 긍정적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만든다. 2011년에 관객 748만명 이상을 확보한 것은 이런 힘이었으리라.
 
반면 <남한산성>은 청의 기습으로 강화도 피란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간 인조와 조정대신들이 주화와 척화를 놓고 벌이는 논쟁을 답답하게 다룬다.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청에 항복해야 한다는 신하들과 대의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워야 한다는 자들이 벌이는 지루한 논쟁과 인조의 우유부단함이 관객들을 우울하게 만든다. 이 때문인지 <남한산성>의 관객은 384만명에 그쳤다.
 
관객들은 아픈 역사를 그대로 재현하는 ‘역사우울증’보다 실패한 역사 속에서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희망의 역사’를 기대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 강요된 ‘식민사관’이 만들어 놓은 ‘식민지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것, 즉 자학적 모멸감으로 부정적 되먹임을 강화하지 말고 자긍심과 미래지향적인 발전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는 말이다.

◆중국 자국이기주의에 휘청대는 '브레튼우즈 체제'

역사우울증에서 벗어나는 일은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질서를 유지하고 번영을 가져왔던 ‘브레튼우즈 체제’가 흔들거리며 자국이기주의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요즈음 매우 절실한 과제가 되고 있다.
 
브레튼우즈 체제란 미국 뉴햄프셔 주에 있는 브레튼우즈 스키 휴양지의 ‘마운트 워싱턴 호텔’에서 1944년 7월, 44개 국가에서 온 730여명의 대표단이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WB) 관세무역일반협정(GATT)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미국이 주도한 브레튼우즈 체제는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유럽을 부흥시키고, 소련과의 냉전이 진행되면서 한국, 일본 등의 경제성장을 뒷받침했다. 

2001년 12월11일에는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함으로써 브레튼우즈 체제는 더욱 확산됐다. 특히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뒤이은 소련 해체로 세계 유일의 슈퍼파워가 된 미국 주도권은 더욱 튼튼해졌다.

하지만 중국이 WTO에서 단물만 빼먹으며 독일과 일본을 차례로 제치고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경제대국으로 부상한 뒤부터 상황이 바뀌었다. 중국이 미국시장에서 번 달러로 남미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을 자신의 영향권에 끌어들이고 소련에서 항공모함을 사들여 미국의 제해권에 도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서부터다. 특히 미국 입김이 강한 IMF에 자국의 의결권을 요구하다 거부당하자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설립해 딴살림을 차렸다.
 
미국은 오바마 대통령 때부터 아시아로 돌아와 자신을 제치고 지역패권국이 되려는 중국을 견제하기 시작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과 강력한 통상마찰을 일으키며 브레튼우즈 체제 자체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사인을 보내고 있다. 미국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데 더 이상 세계의 시장, 세계의 경찰 역할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북풍한설에 굶주려도… 씨앗은 지켜야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는 '춘래불사춘'을 되뇌는 사람이 늘어난다. 기온은 이미 많이 올랐지만 땅속 깊이 숨어 있던 한기가 불쑥 튀어나오며 옷깃을 여미게 하는 탓이다. 

올해는 춘래불사춘이 더욱 절실해지는 듯하다. 북미 하노이정상회담이 구체적성과 없이 결렬된 뒤 북한이 동창리 미사일기지를 재건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중미 통상마찰을 해결할 정상회담이 일정을 잡지 못하고 자꾸 늦어지고 있다. 

한국경제의 버팀목이었던 반도체와 스마트폰시장이 꺾이면서 긴장도가 높아지고 눈덩이처럼 불어난 가계부채 속에서 부동산시장이 불안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토머스 하디의 소설 <더버빌가의 테스>에서 테스는 봄이 오자 텃밭에서 농사지을 준비를 하다 깜짝 놀랐다. ‘대책 없는 사람들의 마지막 실수’라고 말하는 것처럼 “씨감자까지 다 먹어치워” 심을 씨감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북풍한설의 굶주림 속에서도 튼실한 씨앗은 먹지 않고 견뎌내면서 준비를 해야 수레를 얻을 수 있는데 씨감자를 먹어버렸으니 비빌 언덕마저 없어진 것이다. 

브레튼우즈 체제가 휘청거리는 변혁기에 희망찬 미래를 활짝 열어줄 석과(튼실한 씨앗)를 마련하고 지키기 위해 역사우울증에서 벗어나는 일은 더이상 미룰 수 없는 급선무다. 역사는 지나간 과거를 가슴으로 느끼고 다가오는 미래를 꿈꾸며 준비하는 사람의 것이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84호(2019년 3월19일~25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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