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웅의 여행톡] 일흔하나의 상흔 '북촌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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옴팡밭, 동백 숨죽여 피고 지네
제주4·3 대학살, 그리고 '기억의 비극'


낸시빌레 인근 해변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북촌과 서우봉. /사진=박정웅 기자
낸시빌레 인근 해변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북촌과 서우봉. /사진=박정웅 기자
제주의 돌담은 샛바람에 끄떡없다. 현무암은 바람에 날릴 것처럼 위태로워 보이지만 서로를 이고지고 앉아 바람을 기꺼이 맞는다. 구멍 숭숭 뚫린 현무암 사이로 날선 세월이 오갔나. 시커먼 돌담 너머 동백꽃은 붉은빛이 곱다. 꽃샘추위에도 삶의 끝자락을 더 찬연히 태우는 모양이다. 순간 툭 하고 모가지 통째로 떨어진다. 검은 제주의 흙을 마주한 동백은 또 한번 검붉게 핀다. 침묵과 어둠의 70여년, 동백은 닫힌 몽우리를 가슴에서 숨죽여 터트렸으리라.

북촌포구 끝의 등명대. /사진=박정웅 기자
낸시빌레 인근 해변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북촌과 서우봉. /사진=박정웅 기자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올레길 19코스를 따라 서우봉 자락에서 바라본 북촌은 빠지는 구석 없는 풍광을 간직했다. 멀리 북촌포구, 붉은 등명대가 검푸른 바다를 향해 손짓한다. 현무암 갯바위는 거센 바람이 몰아온 하얀 포말에 검은 얼굴을 드러냈다가 사라지기를 거듭한다. 바람 덜한 양지 바른 골목길 언저리엔 노란 유채꽃이 듬성듬성 피었다. 영락없는 제주의 포구마을이다.

◆<순이 삼촌>과 북촌대학살

제주4·3을 상징하는 동백꽃. /사진=박정웅 기자
낸시빌레 인근 해변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북촌과 서우봉. /사진=박정웅 기자
현기영의 소설 <순이 삼촌>의 무대를 찾았다. 제주 출신인 현기영은 이 소설로 제주4·3(1948~1954년)의 참상을 적나라하게 소개했다. 이때가 1978년이니 30여년 만에 4·3을 처음 ‘광장’으로 끌어낸 셈이다. 물론 그 대가는 단단히 치렀다. 군사독재정권의 서슬 시퍼런 눈을 피할 순 없었기 때문이다. 고문이 이어졌고 그의 소설은 ‘판금’(출판 및 판매 금지) 조치를 당했다.

1949년 1월17일, 북촌리에서 참극이 빚어졌다. 너븐숭이에서 무장대의 습격으로 군인 2명이 숨진 것을 군인들이 보복한 것. 주민 300여명을 북촌초등학교 인근에서 학살했다. 북촌대학살의 비극은 30여년 뒤로 이어졌다. 피해자 유족인 소설의 주인공인 순이삼촌이 자신의 두 자녀가 학살당한 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음으로서 말이다.

너븐숭이 4·3기념관 인근의 <순이 삼촌> 문학비. 작품 속 옴팡밭 조형물도 함께있다. /사진=박정웅 기자
낸시빌레 인근 해변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북촌과 서우봉. /사진=박정웅 기자
“그 옴팡밭에 붙박인 인고의 삼십년, 삼십년이라면 그럭저럭 잊고 지낼 만한 세월이건만 순이 삼촌은 그러질 못했다. 흰 뼈와 총알이 출토되는 그 옴팡밭에 발이 묶여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었다. … 그러나 오누이가 묻혀 있는 그 옴팡밭은 당신의 숙명이었다. 깊은 소(沼)에 물귀신에게 채여가듯 당신은 머리끄덩이를 잡혀 다시 그 밭으로 끌리어갔다. 그렇다. 그 죽음은 한달 전의 죽음이 아니라 이미 삼십년 전의 해묵은 죽음이었다. 당신은 그때 이미 죽은 사람이었다.”(현기영, <순이 삼촌>)

순이 삼촌은 학살의 현장에서 용케 살아남았지만 이후의 삶은 ‘산 송장’이었다. 결국 ‘꿩약 싸이나’로 옴팡밭에서 앞서간 오누이의 뒤를 따른다. 그곳은 <순이 삼촌> 문학비가 세워진 곳이다. 기다란 현무암 조형물이 나뒹군다. 당시 총탄에 스러진 주민들의 시신을 형상화한 것처럼 이 중 하나는 소설의 한 대목을 새겨 당시의 참상을 증언했다.

너븐숭이 4·3기념관. /사진=박정웅 기자
낸시빌레 인근 해변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북촌과 서우봉. /사진=박정웅 기자
“그 당시 일주도로변에 있는 순이 삼촌네 밭처럼 옴팡진 밭 다섯 개에는 죽은 시체들이 허옇게 널려 있었다. 밭담에도, 지붕에도, 듬북눌에도, 먹구슬나무에도 어디에나 앉아있던 까마귀들. 까마귀들만이 시체를 파먹은 게 아니었다. 마을 개들도 시체를 뜯어먹고 다리토막을 입에 물고 다녔다. 사람 시체를 파먹어 미쳐버린 이 개들은 나중에 경찰 총에 맞아죽었지만 그 많던 까마귀들은 모두 어디 갔을까?”

◆팽나무, 옴팡밭 굽어보다

너븐숭이 애기무덤. /사진=박정웅 기자
낸시빌레 인근 해변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북촌과 서우봉. /사진=박정웅 기자
학살의 마수는 순이 삼촌의 오누이를 비롯해 어린아이에까지 뻗쳤다. 옴팡진 밭과 너븐숭이 4·3기념관 사이의 애기무덤이 이를 확인한다. 학살 뒤 어른들의 시신은 산자들이 거둬 다른 곳으로 이장했다. 반면 어린이들의 시신은 임시 매장했는데 그대로 남았다. 너븐숭이 4·3기념관을 기점으로 ‘북촌마을 4·3길’(약 6㎞)이 조성됐다. 기념관-서우봉(몬주기알)-북촌환해장성-가릿당-북촌항-낸시빌레-꿩동산-포재단-마당궤-당팟-정지퐁낭 기념비-기념관 원점 회귀 코스다. 굳이 순서를 정해 놓고 걷지 않아도 된다. 도처가 비극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길을 시작한 서우봉 올레길도 학살의 현장이다.

북촌초등학교. 운동쪽 한쪽에는 1949년 참상을 설명한 기념비가 있다. /사진=박정웅 기자
낸시빌레 인근 해변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북촌과 서우봉. /사진=박정웅 기자
기념관에서 일주대로를 따라 동쪽으로 조금 걸음하면 북촌초등학교다. 마을 주민들이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떤 곳이다. 운동회 때 쓰인 ‘장대’가 생사를 갈랐다고 한다. 북촌초등학교는 대학살 직후인 2월10일 폐교됐다. 이듬해인 7월에 다시 문을 열었다. 교정 안쪽 끝 일주대로 쪽에 기념비가 있다.

북촌초등학교의 교목은 팽나무다. 제주사람들은 팽나무를 퐁낭이라 부른다. 퐁낭은 4·3길의 상징 로고다. 제주 땅과 사람을 오랫동안 지킨 정주목처럼 분열된 공동체를 복원한다는 뜻이다. ‘장대’로 분리된 주민들은 당팟에서 희생됐다. 퐁낭 몇 그루가 당팟을 굽어본다. 이곳에서만 100여명이 숨졌다. 북촌대학살은 북촌초등학교 동쪽의 당팟과 서쪽의 너븐숭이에서 이뤄졌다. 당팟을 잇댄 일주대로변에는 정지퐁낭 기념비다. 일부 기념비에는 총탄의 흔적이 여전하다.

당팟의 학살현장을 굽어보는 팽나무들. /사진=박정웅 기자
낸시빌레 인근 해변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북촌과 서우봉. /사진=박정웅 기자
일주대로의 동복입구 교차로 인근에는 또 다른 학살지인 낸시빌레가 있다. 이곳은 대학살 직전인 1948년 12월16일 북촌 청년 24명이 희생된 곳이다. 이유는 1948년 5월10일 남한 단독선거에 불참했다는 것. 낸시빌레를 가리키는 표식은 아쉽게도 설치되지 못했다. 반대 민원 때문이란다. 교차로 입구의 호텔 왼쪽편, 야자수를 배경으로 둔 공터쯤이 학살지로 추정된다.

◆70여년 세월, 그리고 ‘기억의 자살’

정지퐁낭 기념비. 뒷편이 학살지인 당팟이다. /사진=박정웅 기자
낸시빌레 인근 해변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북촌과 서우봉. /사진=박정웅 기자
오랜 세월, 낮게 흐느끼는 곡소리가 한날 한마을을 짓눌렀다. 4·3의 공식 희생자수는 1만4233명(제주4·3평화재단, 2018년 기준)이다. 비공식적으론 2만~3만명이라는데 이 수는 당시 제주인구의 10명 중 1명꼴이다. 그럼에도 ‘사삼’(4·3)이라는 이 두 글자는 오랫동안 금기어였다. ‘항쟁’, ‘사건’, ‘폭동’…. 4·3의 성격을 규정할 용어는 아직 정리되지 않았다. 2007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학살을 공식 사과했음에도 말이다. 그러니 4·3에 대한 규정은 현재진행형이다.

제주4·3연구소는 4·3을 “1947년 3월1일 경찰의 발포사건을 기점으로 하여 경찰·서청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선·단정 반대를 기치로 1948년 4월3일 남로당 제주도당 무장대가 무장봉기한 이래 1954년 9월21일 한라산 금족지역이 전면 개방될 때까지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대와 토벌대간의 무력충돌과 토벌대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희생당한 사건”이라고 정의했다.

또 다른 학살의 현장인 낸시빌레. /사진=박정웅 기자
낸시빌레 인근 해변에서 서쪽으로 바라본 북촌과 서우봉. /사진=박정웅 기자
‘좌익’, ‘우익’, ‘무장대’, ‘토벌대’, ‘폭도’, ‘서청’(서북청년단), ‘육지것’(응원 군·경)…. 4·3과 잇댄 날선 말은 많다. 이념을 앞세워 민족끼리 서로 물어뜯었다는 단순도식이다. 하지만 학살에 앞서 짚어야 할 게 있다. 많은 역사학자들은 비극이 우리 손으로 일제를 몰아내지 못한 데서 비롯했다는 데 동의한다.

소설가 김석범은 ‘기억’을 이렇게 적었다. “기억이 말살당한 곳에는 역사가 없는 것입니다. 역사가 없는 데는 인간의 존재가 없는 것입니다.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은 사람이 아닌 주검과 같은 존재입니다. 반세기 넘도록 기억을 말살당한 4·3은 한국 역사 속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나는 이것을 ‘기억의 자살’이라고 불렀습니다.”

☞ 본 기사는 <머니S> 제585호(2019년 3월26일~4월1일)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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