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의 문사철 경국부민학 31] 승리는 힘·운·리더십·민심의 함수

김윤후의 처인성 승리, 참된 지도자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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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2년 섣달 열엿새, 승장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 600여명은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고 정예병 수만 명의 인해전술을 막아냈다. 물리치고 쳐부수고 싸워 이겼다. 그것은 기적에 가까운 승리였다. 어떻게 이런 승리가 가능했을까. /사진=이미지투데이
사건은 공정하다. 하지만 이긴 사람의 기록인 역사는 왜곡돼 있다. 승리자는 자기의 업적을 과장한다. 잘못한 일은 잘한 일로 꾸며진다. 진 사람은 설 자리도 할 말도 없이 무참히 짓밟힌다. 역사책을 읽을 때 쓰인 글과 제시된 자료만 보면 실제 사건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매우 어렵다. 합리적 상상력이 필요한 이유다.

이겼으면서도 이겼다고 당당하게 기록되지 못한 역사가 있다. 세계전쟁사에서도 수위를 차지할 정도로 기적에 가까운 승리를 거뒀지만 자세한 내용이 전하지 않는다. 무기도 변변치 못하고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에 가까운 600여명이 몽고군 최정예병 수만 명의 공격을 막아내고 이겼다.

1232년 섣달 열엿새, 승장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 600여명은 살리타이가 이끄는 몽고 정예병 수만 명의 인해전술을 막아냈다. 물리치고 쳐부수고 싸워 이겼다. 그것은 기적에 가까운 승리였다. 어떻게 이런 승리가 가능했을까. 



비정규병 600여명 대 최정예병 수만명


몽고군의 패배 요인은 3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교만이다. 살리타이는 처인성이 야산 끝 작은 구릉에 있는 조그만 성이라는 것만 보고 숫자로 밀어붙였다. 군량미가 거의 떨어진 그는 곡식을 저장하는 창성(倉城)인 처인성을 공격했다. 대규모 병력을 투입해 속전속결로 군량을 확보한 뒤 충주까지 진격하기 위해서였다. 정부군도 아닌 승병과 부곡민 수백명의 저항은 무시할 수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교만한 군대는 반드시 지게 마련이라는 교병필패(驕兵必敗)의 덫에 걸렸다.

둘째 상대를 몰랐다. 상대를 얕잡아 보고 자세히 알려고 하지 않았다. 처인성 근처의 지형지물을 연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전세계를 벌벌 떨게 한 몽고 기마병의 기동력과 그 어떤 유럽 성도 깨부순 공성무기만을 과신했다. 하지만 고려의 전장은 유럽과 달랐다. 산이 많아 기마병의 기동력이 떨어지고 공성무기는 흙으로 쌓은 토성에는 효과가 떨어졌다. 그는 광주산성을 함락시키지 못했으면서도 교훈을 얻지 못했다. 나도 모르고 적도 몰랐으니 싸울 때마다 반드시 위태로워 패배할 것이라는 손자병법을 애써 무시했다.

셋째 물러설 줄 몰랐다. 기마병 500명과 공성전 보병 500명 등 1000명의 선공부대가 처인성을 공격했지만 다수가 전사하고 부상당하며 패배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병사를 2000명으로 늘려 총공격했다. 좁은 지역에 병사가 밀집돼 있으니 공격이 잘되지 않았다. 승리에 목마른 살리타이는 최전방에 나서 공격을 독려하다 김윤후가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함으로써 몽고군이 패배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공격할 때는 공격하고 물러설 때는 그쳐야 하는 이치를 몰라 자신과 부하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다. 



정보와 설득에 기반한 리더십이 승리로


김윤후와 처인부곡민의 승리 요인은 4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자신과 적을 정확히 알았다. 군량미는 떨어지고 승리에 목말라 속전속결로 서두를 것이라는 사정을 파악했다. 광주산성 전투에서 몽고군의 취약점도 파악했다. 자신들이 처한 상황도 냉정하게 인식했다. 그에 따라 방어전략을 짰다. 자신을 알고 적을 알면 백번 싸워도 위험하지 않게 반드시 승리한다.

둘째 김윤후의 리더십이다. 몽고군 최정예부대가 공격해온다는 얘기를 듣자 승병과 부곡민은 불안에 떨며 도망칠 생각에 가득 찼다. 이때 그는 활을 꺼내 성 위 하늘을 나는 매를 쏘아 떨어뜨렸다. 그와 함께하는 승병들의 활 실력이 이 정도니 믿고 싸우자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또한 부곡민의 마음이 움직일 수 있는 결정적인 약속을 했다. “몽고군과 싸워 이기면 조정에 건의해서 천민에서 벗어나 벼슬길을 열어 주도록 하겠다.”

셋째 지형지물을 효과적으로 이용했다. 김윤후는 성 주위를 흐르는 완장천 계곡에 목책을 설치하고 함정을 파는 등 기마병을 막는 장애물 만들었다. 샘물을 길어다 성 앞의 논과 들에 부어 빙판을 만들었다. 섣달 중순이라 추운 날씨를 이용해 얼음판을 만들어 기병과 보병의 공격을 무디게 했다. 성 뒤에 있는 산에서 흙을 퍼다 성벽도 높게 쌓았다.

넷째 인화(人和)다. 장애물을 설치하고 얼음판을 만들며 성벽을 높이는 작업에 처인성 뒤에 있는 함봉산으로 피난 갔던 부곡민이 자발적으로 와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옛날에 주 문왕이 영대를 쌓아 다스리려 하니 백성들이 모두 와서 참여해 하루도 못돼 다 이뤘다는 일이 실제로 일어난 것이다.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은 한마음 한뜻이 돼 기적을 만들었다. 아들딸이 면천(免賤, 천민에서 벗어남)할 수 있다는 꿈, 나라와 겨레 살리겠다는 각오, 그리고 리더가 나를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란 믿음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 덕분이었다.



처인성 승리에서 배우는 지도자 역할 


처인성의 승리는 기적처럼 보이지만 기적은 아니었다. 아무리 강한 군대에도 틈이 있게 마련이다. 김윤후는 몽고군의 그런 틈을 정확히 파악했다. 또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꿰뚫었다. 부곡민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자칫 역모죄로 몰릴지도 모르는 면천을 약속했다. 처인성 승리 후에 처인 부곡은 처인현이 됐다. 고을 전체가 한꺼번에 면천돼 양민이 된 것이다. 김윤후는 상장군 벼슬이 내려왔지만 사양하고 부곡민 면천을 거듭 건의해 약속을 지켰다. 그는 섭량장으로 승진했다가 21년 뒤인 1353년12월, 충주산성에서 방호별감으로 몽고군을 다시 물리쳤다.

김윤후는 ‘이겨야 한다’는 사명감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솔선수범했다. 공동체가 어려움을 당할 때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먼저 도망가고 재물을 챙기는 비겁한 지도자가 되지 않았다. 자신이 배운 것을 십분 활용해 부곡민을 움직여 자신도 살고 부곡민과 나라도 함께 사는 필사즉생(必死則生)의 길을 걸었다.

처인성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뒀음에도 그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다. 자신들은 도망갔는데 천민이 나라를 구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위정자가 기록을 남기지 않았던 것인지, 기록을 남겼는데 후세에 없어진 것인지 불확실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처인성에 대한 관심이 점점 높아져 당시 역사를 재조명하는 움직임이 생겼다. 국난을 당했을 때 지도자는 어떻게 백성을 이끌고, 백성은 지도자와 어떻게 힘을 합해 함께 사는 길을 찾을까. 처인성의 승리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그 교훈을 알려준다. 처인성은 21세기 대한민국의 방향을 알려주는 멋진 스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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