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의 문사철 경국부민학] 백가와 유금필에서 배우는 생사와 정치

충남 부여 성흥산성의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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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성흥산 솔바람길. 성흥산의 상징인 사랑나무. /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충남 부여 성흥산성에 가면 삶과 죽음 그리고 정치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성흥산성은 임천면 군사리 산1-1 성흥산에 있으며 백제 동성왕(재위 479~501) 때 만든 산성이다. 해발 260m로 낮으나 주변에 산이 없어 혼자 우뚝 솟아 있다. 사방을 내려다볼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백제 사비성 수비에 중요한 곳이었다.

백제가 멸망한 뒤 잊혔던 이곳이 최근에는 드라마 촬영지로 유명하다. 성흥산성에 우뚝 솟아 있는 느티나무가 사랑나무로 불리며 젊은이들의 발걸음을 꼬드긴다. 사랑나무 나이는 400~500살 정도로 추정되며 키는 20m이고 몸통둘레는 어른 키의 3배(약 5m)나 된다. 계룡산 너머에서 뜬 해가 부소산성을 지나 이곳에 걸리는 모습을 보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생명의 고동을 느낄 수 있다.



고려 명장 유금필 장군 사당이 왜 이곳에?




성흥산성 꼭대기에는 유태사지묘가 늠름하게 자리 잡고 있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는 데 결정적 공을 세운 유금필(~941) 장군의 사당이다. 유 장군은 황해도 평주(평산) 출신이다. 임천과 지연 및 혈연관계가 없는 그의 사당이 이곳에 있는 사연이 교훈적이다.

유태사지묘 안내판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유금필 장군이) 후백제를 섬멸하고 남방을 다스릴 때 고려 태조를 만나러 가다가 임천에 머물렀다. 그때 이곳 패잔병의 노략질이 심하고 나쁜 병과 흉년까지 겹쳐 민심이 흉흉했다. 유 장군이 패잔병을 평정하고 그들이 노략질한 곡식과 군량을 나눠 주고 둔전을 운영하며 선정을 베풀었다. 임천 백성이 감사해 산에 사당을 세워 장군의 공덕을 기리고 해마다 제사를 올려왔다.”

고려 성종이 ‘태사유공묘’(太師庾公廟)라는 어필 현판을 내렸다. 유 장군 후손들이 1976년 옛 사당 바로 옆에 사우를 짓고 매년 음력 3월18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임천 백성이 자발적으로 유태사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낸 것은 유 장군의 선정에 심복했기 때문이었다.

백성이 잘 사는 정치를 진심으로 펼치면 백성들은 스스로 고마움을 표현한다. 부정부패로 백성을 착취한 위정자가 총칼과 권력으로 억지로 세운 공덕비(功德碑)와는 차원이 다르다.

맹자는 이를 ‘마음 속에서 기뻐해 정성스럽게 따르는’ 성복이라고 했다. “힘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려고 하는 것은 마음으로 따르는 심복이 아니라 힘이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덕으로 사람을 복종시키는 것은 마음 속에서 기뻐 진심으로 따르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유금필은 ‘백성을 잘 살도록 하는 게 정치와 군사의 기본’임을 잘 알았기 때문에 죽은 지 1000년이 넘도록 후세의 제삿밥을 먹고 있다.



동성왕을 죽이고 역사에서 사라진 백가




유금필이 성흥산성의 주인공이 되기 전의 임자는 백가였다. 백가는 백제 대성팔족에 속하는 귀족으로 동성왕 시절에 ‘위사좌평’을 지낸 실력자였다. 동성왕이 임천에 있는 성흥산의 전략적 가치를 알고 그곳에 산성을 쌓고 가림성으로 불렀다. 왕이 백가를 그곳 방어책임자로 임명하자 백가는 병을 핑계로 부임하지 않으려 했다. 왕이 허락하지 않자 동성왕을 시해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삼국사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8월에 가림성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에게 지키도록 했다. 10월에 왕이 사비 동쪽으로 사냥을 나갔고, 11월에 사비 서쪽에 사냥을 나갔다가 큰 눈을 만나 마포촌에서 머물렀다. 이때 자객을 시켜 왕을 시해했다.” 동성왕의 둘째 아들 사마가 왕위(무령왕)에 올라 백가를 토벌하고 목을 베어 시체를 백강(백마강)에 던졌다.

위사좌평은 16품 관등 가운데 가장 높은 1품 등급으로 6좌평의 하나다. 왕의 호위를 담당하는 최고 관직이었다. 동성왕은 즉위 8년에 백가를 위사좌평에 임명하고 남제에 사신으로 보낼 정도로 중용했다. 백가는 이런 배려를 반란과 시해로 갚았고 무령왕에 의해 참시됐다. 장례도 치르지 못한 채 역사에서 사라졌다. 가림성의 중요성을 파악한 왕이 그에게 중책을 맡긴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한 채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며 앙심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밀리면 끝장’에 얽매일 때 진짜 끝장 온다




성흥산성의 첫 주인인 백가는 사라졌고 400년 뒤에 온 유금필 장군은 죽어도 오래오래 살고 있다. 삶과 죽음을 가른 것은 정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행하지 못한 것과 정치를 알고 행한 것이었다.

정치의 기본은 국민들이 할 일을 갖고 별다른 걱정 없이 먹고 자고 입도록 하는 것이다. “백성은 먹는 것을 하늘로 여기고 왕은 백성이 하늘이다”라는 ‘민이식위천 왕이민위천’(民以食爲天 王以民爲天)라는 말은 이래서 나온다.

백제의 마지막 왕이었던 의자왕은 시호에 드러나듯이 의롭고 자애로웠다. 부모를 효로 섬기고 형제들과 우의가 좋아 해동증자로 불렸다. 증자는 공자의 제자 가운데 효의 상징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42년 동안 백제 부흥에 힘쓴 무왕의 뒤를 이어 15년 동안 정사를 훌륭히 다스렸다. 16년째 들어 음황(淫荒)에 빠져 충신 성충을 옥사시켰고 흥수도 귀양보냈다.

민심이 떠난 틈을 신라와 당의 연합군이 파고들었다. 계백의 5000 결사대의 죽음도 헛수고였다. 의자왕은 재위 20년 만에 당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죽었다. 도탄에 빠졌던 백성들은 전쟁의 참화 속에서 수없이 죽었다. 700년 동안 이어졌던 백제문화는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꽃은 피기가 어려워도 지는 건 금방이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선 힘들게 피땀을 흘려야 하지만 내리막으로 굴러떨어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백성들의 마음을 얻기는 쉽지 않지만 민심이 떠나는 것은 눈 깜짝할 새다. 눈과 귀를 활짝 열어 국민이 원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을 보고 들어야 국민의 공감을 얻을 수 있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것은 마지막을 초래하는 지름길이다.

성흥산성의 사랑나무를 보면 그 자태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그 높은 곳에 누가 심고 가꿨을까. 저절로 싹이 트고 비와 햇살을 받아 땅의 힘으로 컸을까. 사람은 짧고 나무는 길다. 나무도 죽지만 역사는 계속 이어진다.

눈앞의 이익에 눈멀어 반란을 일으킬까. 아니면 당장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백성의 마음을 얻을까. 선택은 스스로에게 달렸다. 고르는 것은 내 자유지만 선택의 결과는 삶과 죽음 이상이다. 하늘과 역사에 죄짓고는 벗어날 길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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