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의 문사철 경국부민학] 거목 되려 팔다리 자르는 나무 본받아라

박달과 금봉의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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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미지투데이
경상도 선비 박달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길을 나섰다. 며칠 만에 제천에 이르러 충주로 가야 할 때 높은 고개를 넘어야 했다. 날이 저물어 재 아랫마을에서 하루 묵었는데, 주인 집 딸인 금봉이와 눈이 맞아 사랑을 나누었다. 박달은 과거급제하고 돌아와 백년가약을 맺겠다고 약속하고 상경했다. 

금봉이는 머리를 학처럼 빼고 기다렸지만 박달은 소식도 없었다. 기다림에 지친 금봉이는 그만 가슴이 터져 죽었다. 장사 지낸 지 사흘 뒤, 과거에 낙방해 비 맞은 쥐 꼴을 하고 박달이 돌아왔다. 박달은 식음을 전폐하고 슬퍼하다 문득 고개를 쳐다보니 금봉이가 춤을 추면서 고개로 가고 있었다. 마지막 힘을 낸 박달은 고갯마루로 달려가 금봉이를 껴안았지만, 금봉은 없어지고 박달은 낭떠러지로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외세에 맞선 방파제 역할을 한 박달재



박달재는 거란과 몽고 및 일제와 공산주의 등 외세를 막고 몰아내는 방파제였다. 제천의 봉양(鳳陽)읍과 백운(白雲)면을 잇는 박달재는 충주를 거쳐 서울로 가는 교통요지에 자리 잡고 있어 운명적으로 지워진 역할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해냈다.

1217년에 고려를 침략한 거란군이 충주를 넘어 제천으로 진군하려 했다. 이때 김취려(金就礪, ?~1234) 장군이 박달재에서 대승을 거뒀다. 당시 사로잡은 거란 병사들을 한 곳에 모아 살며 장사를 하게 했다. 봉양읍 공전리에 있는 글안장터라는 지명은 그때부터 유래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김 장군은 한 해 전에 거란족이 침입했을 때는 후군병마사로서 의주 삭주 영주 등에서 거란군을 물리쳤다. 40여년이 흐른 뒤인 1258년 10월에는 별초구군이 박달재에서 몽고군을 요격하고 포로들을 구출해 냈다. 몽고군이 전국을 유린할 때 박달재는 그들의 침략과 약탈에 큰 타격을 가한 것이다.

구한말에 일제침략이 본격화됐을 때는 제천의병이 일어나 활동하던 본거지였다. 박달재 아래 봉양읍 공전(公田)리의 자양영당(紫陽影堂)에서 의암 유인석을 중심으로 일어난 제천의병이 박달재를 넘어 충주부를 공격, 친일에 앞장섰던 충주관찰사를 베고 기세를 올렸다. 제천으로 후퇴한 뒤에도 박달재는 든든한 방어선 역할을 했다. 6.25남침 때는 남하하는 공산군의 내륙진격을 저지하는 작전에서 중요한 전략거점이 됐다.

박달재는 또한 인근의 천등산 지등산 인등산과 함께 천지인을 모두 갖춘 곳이어서,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박달이와 금봉이의 애달픈 사랑만 알려져



박달재는 슬프다. 후손들이 높고 큰 역사적 의의를 이어가지 않고 ‘박달이와 금봉이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만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1948년에 발표된 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가 인기를 끌면서부터다. 반야월(본명 박창오)이 노랫말을 짓고 김교성이 곡을 붙인 이 노래는 중장년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아직도 노래방에 가면 상위에 올라 있다.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님아/ (중략)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1절)
도토리 묵을 싸서 허리춤에 달아주며/ (중략) /금봉아 불러 보면 산울림만 외롭구나(2절)

박달재 고갯마루에는 <박달재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김취려장군대첩비 바로 앞이다. 문제는 반야월의 친일행위다. 그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다음해인 1942년 <일억 총진군>의 노래 가사를 짓고 직접 노래까지 불렀다. 그 내용이 참으로 가관이다.

나아가자 결전이다 일어나거라/ 간닌부쿠로(인내를 담은 주머니)의 줄이 끊어졌다/ 민족의 진군이다 총력전이다/ (중략) / 올려라 히노마루 빛나는 국기/ 우리는 신의 나라 자손이란다/ 임금께 일사보국(一死報國) 바치는 목숨/ 무엇이 두려우랴 거리끼겠소/ 대동아 재건이다 앞장잡이다/ 역사는 아름답고 평화는 온다/ 민족의 대진군아 발을 맞추자/ 승리다 대일본은 만세 만만세

이 가사를 일본인이 썼다면 그나마 이해할 수 있으리라. 배달민족의 피를 받은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썼다는 것은 핑계에 불과하다. 그런 반야월이 '울고 넘는 박달재' 가사를 지어 노래를 불렀다. 아마도 박달재가 담고 있는 역사성을 ‘박달이와 금봉이의 사랑이야기’로 덮으려는 ‘음모’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지나친 상상일 것이다. 하지만 그의 노래가사에 정신이 팔려 박달재 역사가 갖고 있는 얼을 잃고 있는 상황을 보면 완전히 억측은 아닌 듯해서 씁쓸하다.



지식의 탈을 쓴 껍데기를 벗고 사람이 되라



박달재에 '천년목찰'이란 문패를 단 이층건물이 있다. 1층에 ‘목굴암’(木窟庵)과 ‘오백나한전’이 있고 2층에 목각체험관과 전시관이 있다. 이성호(법명 성각) 작가가 1000년 묵은 느티나무 고목 속을 파내고 그 안에 아미타불과 삼존불 및 오백나한을 새겼다.

성각은 “느티나무는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 사람들에게 절을 받으며 수백 년을 사는 장수목(長壽木)”이라며 “금봉이는 박달이의 과거급제를 절하며 빌었던 그 정성을 느티나무 고목에 부처를 새겨 사람들의 자성(自性)을 찾을 수 있도록 목굴암과 오백나한전을 만들었다”고 했다.

“지식을 많이 가진 율사(판사 검사 변호사)와 의사들이 지식을 많은 사람들이 잘 살 수 있는 것에 사용하지 않고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 쓰고 있는 것은 ‘지식 탈을 쓴 껍데기’다. 자녀와 후손들을 타락시키는 물질을 물려주려고 억지 부리지 말고 문화와 정신을 이어갈 수 있도록 하는 참사람이 많아지기를 기원하며 쉬지 않고 조각했다”는 것이다.

박달재는 많은 역사와 사연을 담은 고개다. 박달이는 걸어서 한양에 갔다 왔다. 자동차 길이 생긴 뒤에 걸어 오가던 길은 ‘박달재옛길’이 되었다. 이제는 고개 아래 4차선 터널이 뚫리어 박달재 자동차길도 자전거 동호인들이 찾는 고즈넉한 길이 되었다. 김취려 장군과 별초군과 제천의병은 거의 잊히고 있다. '울고 넘는 박달재'에 묻힌 때문이다.

박달재에서 25년 째 조각 수행을 하고 있는 성각은 “조각을 하다 보니 나무도 뼈와 살이 있고 자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며 “수백 년을 사는 나무들은 오랜 세월을 버틸 수 있는 튼튼한 줄기를 만들기 위해 잔가지들을 스스로 죽이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했다. 사회와 나라를 위해 개인의 이기심을 죽일 수 있는 있는 공동체가 건강하다. 나무는 집단이기주의에 휩싸여 옳고 그름을 가리지 못하는 지식의 탈을 쓴 껍데기들을 회초리로 내려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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