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선의 문사철 경국부민학] 순천 낙안읍성에서… 울고 있는 임경업 장군을 보다

생활에 스며든 역사우울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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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안읍성 민속마을./사진=이미지투데이
낙안읍성 민속마을./사진=이미지투데이
1410m에 이르는 성벽 위를 새벽노을을 먹으며 걷는다. 하늘이 푸른빛 동살에서 발갛게 물들다 첫 햇살이 햇귀로 비치는 시간을 따라 풍광이 달라진다. 어스름에 부끄러운 듯 모습을 감추고 있던 초가집이 옹기종기 그대로의 얼굴을 드러낸다.

조용하게 잠들어 있던 동네 여기저기에서 수탉이 기상나팔을 불어 아직까지 일어나지 않은 게으름뱅이들 어서어서 문 열고 나오라고 재촉한다. 참새떼는 멀리서 온 손님을 두 손 들어 맞이하는 듯 목소리 가다듬어 환영의 노래를 합창으로 들려준다. 닭이 성 밖으로는 누렇게 익어가는 벼가 황금물결을 일으키고….

순천(順天)에 있는 낙안읍성에서 맞이하는 새날은 미국 CNN이 왜 이곳을 ‘한국 최고 여행지 50선’에 뽑았는지 온몸으로 알 수 있게 한다. 북쪽 진산인 금전산(金錢山·668m)과 동쪽 오봉산(192m)이 좌청룡으로 활기차고 백이산(伯夷山·582m)이 우백호로 늠름하며 제석산(帝釋山·563m)이 안산 역할을 하며 아늑하게 에워싸고 있는 분지에 자리 잡고 있다.



올바른 정치로 이름 떨친 임경업 장군




낙안읍성은 1397년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왜구 침입이 잦아지자 김빈길이 의병을 일으켜 흙으로 성을 쌓은 게 시초다. 이후에 돌로 쌓아 방위력을 높였다. 조선 중기 최고의 무장(武將)이었던 임경업 장군이 1626년 낙안군수로 부임했을 때 석성을 더욱 크고 튼튼하게 고쳐 쌓았다. 그는 성을 중수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는 한편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나아지도록 어진 정치를 폈다.

읍성 중앙 북쪽에 자리한 동헌(東軒) 옆 객사(客舍) 앞에는 임경업 군수의 선정(善政)을 기리는 비각이 있다. 그가 한양 내직으로 떠날 때인 1628년에 세운 공덕비(군수임공경업선정비)와 비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비각으로 구성돼 있다. 군수로 재임하던 2년 동안 베푼 선정을 기념하기 위해 아직도 매년 정월 대보름에 이 비각에서 제를 올리고 널뛰기와 그네뛰기 및 성곽돌기 등의 민속행사를 열고 있다.

임경업(林慶業·1594~1646) 장군은 시대를 잘못 만난 영웅이었다. 그의 호가 외로운 소나무라는 뜻의 고송(孤松)인 것이 그의 비극적 죽음을 예고했는지도 모른다. 충북 충주의 달내(達川)에서 태어난 그는 24세 때 동생 임사업과 함께 무과에 급제했다.

그는 정묘·병자호란 때 청에 맞서 싸웠다. 인조가 청에 항복한 뒤인 1640년 청의 요청으로 명을 공격하기 위해 참전한 그는 명과 내통하고 청에 협조하지 않았다. 청에 체포된 뒤 극적으로 탈출해 숨어 지내다 명으로 망명했지만 명의 멸망으로 청에 다시 생포됐다. 인조가 임경업을 처단하기 위해 송환을 요청해 한양에서 친국을 받던 중 김자점의 밀명을 받은 형리에게 맞아 죽었다.

이괄의 난 때 정충신의 휘하에서 반란 평정에 공을 세워 인조를 도왔던 그는 결국 인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51년 뒤인 숙종 23년에 복관됐지만 그의 억울한 죽음은 이곳 낙안읍성에서 지내주는 제사에 기대 겨우 고통을 어루만지고 있는지 모른다.



사무당이 죄인 벌만 주는 곳인가?



그런 고통이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것일까. 낙안읍성 동헌에 펼쳐놓은 장면은 우리를 아프게 한다. 동헌 마당 한쪽에는 볼기를 때리는 형틀이 있고 동헌 대청마루 앞에는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무릎 꿇린 죄인 형상을 재현해 놓았다.

포졸이 육모방망이를 들고 죄인을 내려다보고 사또는 동헌 높은 의자에 앉아 호통을 치고 있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고 하는 허무맹랑한 고함이 크게 들리는 듯한 착각에 흠칫 놀란다. 동헌 현판은 사무당(使無堂)이다. ‘권력을 남용하거나 백성을 함부로 다루지 않는 집’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무당 아래에서 펼쳐지는 모습은 사무당의 본뜻과 전혀 다르다. 물론 죄를 지은 사람이 있다면 그 죄를 명명백백하게 가려 그 죄에 맞는 처벌을 내리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사또의 업무 가운데 범인을 심문하고 벌주는 일의 비중이 얼마나 될까. 모진 고문으로 성춘향을 이몽룡에게서 빼앗으려 한 변학도라면 모를까 일반 사또들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관리는 즐겁고 백성은 편안하다’는 뜻을 가진 관락민안(官樂民安)을 줄인 낙안(樂安)이란 고을 이름을 가진 이곳은 더욱 그랬을 것이다. 낙안이라는 이름에 맞게 군수와 백성들이 함께 어울려 백성의 고충을 듣고 어려움을 풀어주는 동헌의 모습을 재현해 놓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것이 임경업 군수의 공덕비가 있고 해마다 그를 기리는 제사를 지니는 곳에 더 부합할 것이다. 사무당도 ‘정사와 판결을 하는 데 삿됨이 없이 오직 올바름으로 한다’는 사무당(邪無堂)으로 하는 것은 어떨까.



생활에 뿌리박힌 역사우울증을 극복해야



낙안읍성 사무당에 재현된 살풍경은 역사우울증이 우리 생활 곳곳에 고질처럼 확산돼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역사우울증이란 한국 역사 가운데 전세계적으로도 인정받고 있는 좋은 것은 애써 무시하고, 굳이 나쁜 측면만을 드러내 우리 역사에 대한 거부와 자멸(自蔑)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자주적 근대화를 위해 일제에 의해 무참하게 시해된 명성황후를 구부(舅婦·시아버지와 며느리)간의 권력투쟁으로 나라를 망친 ‘망국의 여인’으로 폄하하고 일제에 의해 독살된 고종에 대해선 ‘세상 물정에 어둡고 유약한 암약(暗弱) 군주’로 도색하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일제가 만들어 놓고 반민족·친일 역사학자들이 아직도 신봉하고 있는 ‘식민사학’이 만들어 놓은 선입견과 편견에 따른 것이다.

낙안읍성 임경업장군비각 부근에는 엄청나게 큰 은행나무가 있다. 배 모양을 하고 있는 행주형(行舟形) 낙안읍성의 배의 돛대에 해당하는 이 은행나무는 이곳에 처음 토성을 쌓을 때보다 앞선 시기부터 있었던 것이어서 700년 이상 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나무는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의 목숨을 살린 신목(神木)이라는 전설도 갖고 있다.

낙안읍성은 정부가 1983년에 사적302호로 지정했고, 유네스코가 세계문화유산 후보로 검토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곳이다. 동내·서내·남내 등 3개 마을로 이루어진 읍성 안의 전통마을이 거의 원형 그대로 유지되고 100세대 이상이 실제로 살며 생활하고 있는 점이 긍정적으로 평가받은 것이다.

이렇게 멋지고 의미 있는 낙안읍성의 중요한 구성요소 가운데 하나인 동헌 사무당에서 역사 및 현실을 왜곡하는 장면이 재현돼 있다는 것은 심히 통탄할 일이다. 사무당의 모습이 살풍경이 아니라 여민동락하는 화합의 장으로 바꿔 역사우울증이 하루 빨리 역사긍정주의로 바로잡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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